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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 4. 임진왜란의 배경③

기사승인 2019.08.19  00: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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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편제 및 병력수
 
박희봉 교수
조선군의 전투준비가 빈약했던 것에 비해 일본군은 병력수에서 월등했을 뿐만 아니라 장수를 중심으로 확실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일본군 병력수의 근거는 일본전사에 비교적 상세히 나타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나타난 일본군의 총수는 1번대부터 9번대까지의 본대와 예비대, 기타 부대를 합하여 281,840명이다 (<표 1> 참고). 여기에 대마도 도주 소오 요시모토의 5,000명이 1차 참전병력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합산하면 총 286,840명이다.
 
<표1>일본군 편제 및 병력수.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 특수부대는 하타모토(旗本)를 번역한 것이다.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p.65~73;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p.71.
 
한국 역사에는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 총수를 15만명, 보다 정확하게는 15만 8,700명으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일본전사에 1592년 3월 13일 1차 출전병력수에 근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표 1>의 일본군 편제를 바탕으로 약간 다르게 편제되어 있다. 1번대에서 4번대까지는 장수명과 병력수까지 같고, 5번대와 6번대 병력을 합하여 5번대로 명칭하고 병력수는 100명이 줄어든 2만 5,000명으로 재편하였고, 7번대를 6번대, 8번대를 7번대, 9번대를 8번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또한 <표 1>의 일본군 편제 중에서 10번대에 속한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의 병력 3,500명과 14번대의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의 병력 8,000명으로 1만 1,500명의 새로운 9번대를 편성하였다.
 
<표 2> 임진왜란 1차 출전 일본군.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그러나 일본전사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보면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은 15만 8,700명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6만 3,200명이다. 15만 8,700명에는 4,500명의 수군이 빠져있다. 일본전사에는 1차로 육군 15만 8,700명 참전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바로 다음에 수군 4,500명의 지휘관별 병력을 기록하고 있다. 이 1차 출전부대는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가 1592년 4월 13일 절영도에 도착한 이래,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번대가 부산에 상륙하였고, 5월 초까지 후속부대들이 잇달아 조선에 들어왔다.
 
<표 3> 1차 출전 병력 외 참전기록이 있는 병력 수.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 주: 참전병력수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잔여병력수가 참전병력수보다 많을 경우 다른 부대로부터 병력을 보급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재조정한 수치임.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p.65~73 및 pp.257~262.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군 장수로 기록되어 있는 와카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일진왜란 초기 해전뿐만 아니라 용인전투에서 활약하였고, 그 외에도 구키 오시타카(九鬼嘉隆)는 1592년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패한 사실이 일본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즉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나타나 있는 3,980명의 일본군 수군은 임진왜란 참여가 확실하기 때문에 참전병력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본전사에는 조선의 주요 도시에 어느 장수가 점령하고 있었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1번대에서 9번대까지의 장수뿐만 아니라 10번대 이후의 장수들 중에서도 주요 도시를 점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10번대의 난쵸 모토키요(南條元續)은 2,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선산에, 미야베 나가히로(宮部長熙)는 850명의 병사와 함께 인동에 머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4번대의 이바나 사다미치(稻葉貞通)는 1,400명의 병사와 대구에 있었다. 또한 초기의 부대편제에서 보이지 않던 벳쇼 요시하루(別所吉治)는 밀양성, 가메이 코레노리(龜井眞矩)는 기장성, 다니 모리토노(谷衛友)는 이시카와 사다미치(石川貞通) 및 다케나가 시게토시(竹中重利)와 함께 양산성에 주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일본전사에는 진주대첩의 패배로 인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한국 역사에 엄연하게 진주대첩에 참전한 것이 확실한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부대를 참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참전병력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는 1,00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593년 6월에 기록된 잔여 병력수가 1,097로 오히려 늘어났다. 따라서 가토 미츠야스 부대의 사망자 수를 고려하여 다른 부대로부터 병력을 보급 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참전병력수를 1,747명으로 상향 조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1593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전병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전체병력을 점호한 결과는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거의 모든 병력이 조선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즉 1593년 6월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재편한 일본군 부대에는 1번대에서 9번대까지의 장수뿐만 아니라 일본군 전체 부대의 장수와 휘하 병력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즉 <표 1>의 기존 부대 편제에서 10번대에 속해 있던 장수중에서 난쵸 모토키요(南條元續), 미야베 나가히로(宮部長熙), 기노시타 시게카타(水下勝俊), 가키야 츠네후사(垣屋恒總),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 사이무라 히로히데(濟村廣英), 아카시 노리자네 (明石則實), 벳쇼 오시하루(別所吉治),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등이 휘하 장병과 함께 새로이 편제되었다. 11번대 장수중에서는 아사노 나가요시(淺野長慶), 오오타니 요시츠쿠 (大谷吉繼),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등이 휘하 장병과 함께 편제되었고, 특히 기무라 시게코레는 오오타 반스케(太田伴助), 야마다 도사부로(山田蕂藏)라는 새로운 장수와 함께 편제되어 있다. 13번대 장수중에서는 히토츠야나기 가유(一柳可遊)와 하토리 가즈타나(服部一忠) 등 두 장수가 휘하 장병과 함께 새로이 편제되었다. 14번대에서는 대구를 점령하고 있던 아바나 사다미치 (稻葉貞通)가 휘하 장병과 함께 새로이 편제되어 있다. 15번대에서는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가 휘하 병력과 함께 부산성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16번대에서는 사노 료하쿠(伊達政宗)가 휘하 장병과 함께 공격부대로 재편되어 있다. 번외 2번 부대에 속해 있던 장수중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는 휘하 부대원과 함께 공격부대로 재편되었고,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는 휘하 병사와 함께 부산성으로 배치되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임진왜란에 1차 출정하지는 않았지만 참전이 확실한 일본군 병력은 <표 3>에 정리한 바와 같이 5만 6,474명이 추가로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1차 출전 병력 16만 3,200명에 추가 인원 5만 6,474명을 더하면 21만 9,674명이 된다.
 
<표 4> 구글에서 추가로 확인된 임진왜란 참전 지휘관별 병력.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나와 있는 일본군 장수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건너간 사실로 확인된 장수의 병력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표 4>는 일본 구글 등에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위의 21만 9,674명에 포함되지 않은 장수별 부대병력이다. 이 장수들의 병력은 5,000명이다. 따라서 이를 포함하면, 임진왜란에 참전이 확인된 일본군수는 총 22만 4,674명이다.
 
 
<표 5> 부대 편재는 되어 있으나 전투기록이 없는 일본군 지휘관별 병력.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표 5>는 임진왜란 침공을 위해 준비된 일본군 본대와 예비대, 기타 부대 중에서 일본전사에 참전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일본군 지휘관별 병력수이다. 총 병력 28만 6,840명 중에서 참전이 확실한 22만 4,674명을 제외한 인원이다. 산술적으로는 이 병력도 9만 6,550명이나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충한 병력이 있는 등의 이유로 동원되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인원수는 이보다 적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참전한 것이 확실히 기록되었거나 추정할 수 있는 병력과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 병력 간에 차이가 나는 것은 일본전사 기록이 허술한 데에서 기인한다. 일본전사에서 임진왜란 개전 전에 되어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대편제와 실제 전투를 치른 지휘관별 병력수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대편제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으면서 실제 전투에 참여한 지휘관별 병력이 존재한다. 우선 수군에 있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대편제에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 4명의 지휘관별 병력이 총 3,980명으로 되어있다. 일단 이 수군이 1차 침략부대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 4명의 지휘관과 4,500명의 수군 병력은 초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 부대편제에는 없으나, 1차 침공부대를 수송한 수군으로 나타나있다.

둘째, 1차 침략부대로 기록되어 있는 1번대에서 9번대 참전병력과 점호병력을 살펴보면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증가된 부대가 발견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한 1번대 총병력은 18,700명이고, 1년 1개월이 지난 1593년 5월 한양성에서 점호할 때는 총병력이 6,629명으로 줄어든 반면,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시에는 7,415명으로 증가된다. 일본군 2번대 중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이끌고 참전한 자신의 병력은 10,000명이었고, 한양성 점호시에는 5,392명으로 줄어들었으나,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에서는 6,790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일본군 4번대 중에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이끌고 참전한 병력은 2,000명이었고, 한양성 점호 시에는 1,425명으로 줄어들었으나,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에는 1,671명으로 증가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과정 중에 일본군의 각 부대는 일본에 있는 예비대 또는 자신이 영주로 있는 곳으로부터 병력을 지속적으로 보급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임진왜란 개전 당시 1차 침략부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에 확실히 건너온 기록이 있는 부대의 문제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는 예비대 또는 기타 부대로 기록되어 있는 부대의 많은 수가 진주대첩 또는 2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했다. 더욱이 이 예비대 또는 기타 부대 중에서 참전병력보다 잔여병력이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대가 다수 눈에 띈다. 일본군 11번대 아사노 나가요시(淺野長慶)를 따라 참전한 2,500명은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 4,000명으로 병력이 증가됐다. 11번대 오오타니 요시츠쿠 (大谷吉繼)가 지휘한 1,200명의 참전병력은 한양성 점호 시 1,505명으로 증가됐고,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 1,535명으로 또 다시 증가됐다. 히토츠야나기 가유(一柳可遊)의 병력 400명도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 406명으로 증가됐다.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를 따라 참전한 1,000명은 한양성 점호 시 1,400명으로 증가됐고,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에는 1,04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노 료하쿠 (伊達政宗)의 병력 500명은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 1,258명으로 대폭 증가됐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지휘한 2,000명의 참전병력은 한양성 점호 시 1,546명으로 감소됐으나,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 1,646명으로 증가됐다.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의 병력 1,000명은 한양성 점호 시 1,629명으로 증가됐고,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점호 시 1,62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예비대 또는 기타 부대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군 지휘관들이 직접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병력을 보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 뿐만 아니라 2차 진주성 전투 이전 재편된 부대편제에는 초기의 부대편제에 없었던 새로운 장수의 이름도 나타난다. 김해성 방어책임을 맡은 모리 다다마사(毛利重政), 부산성 방어책임을 맡은 모리 히데토모(毛利秀元)와 하야카와 나가마사(早川長政) 뿐만 아니라 진주성 공격부대에 편제되어 있는 구로다 조스이(黑田如水), 4,400명의 병력을 이끄는 성명 미상의 창원11인 등이다.

넷째, 일본군 부대 편제는 평소 친분이 있는 지휘관을 묶어서 편제하였다. 따라서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의 예비대와 번외2번 부대에 소속해 있는 각 부대의 장수는 최소한 2명 이상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친분이 있는 장수가 조선 땅에서 많은 휘하 병사가 치열한 전투로 죽어가고 있는데 일본에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의 예비대와 기타 부대에 편제되어 있던 번외2번 부대는 대부분 조선에 파병되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다섯째, 특수부대에 대한 논의이다. 하타모토(旗本)는 조총수, 기마병, 예비대, 후방부대 등 특수 임무를 맡고 있는 부대이다. 따라서 임진왜란과 같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과정에 이 부대가 참전하지 않고 일본에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특히 당시 전투에서 파괴력이 높은 조총수와 기마병을 전투에 참여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이 특수부대를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으로 추정하면, 번외1번 부대 1만 5,000명이 참전하지 않았을 가능성만 남는다. 14번대의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가 참전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바, 친척관계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保)의 번외1번 부대 역시 참전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같이 새로운 장수 이름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병력이 증가하는 현상은 전쟁 중에 사망자가 속출함에 따라 새로운 장수와 병력이 전투에 추가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임진왜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심복으로 알려져 있는 하세카와 히데카즈 (長谷川秀一), 히데요시의 5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등이 참전한 것으로 미루어 특수부대인 하타모토(旗本)가 전투에 참전했을 것은 당연하다. 특히 이 부대가 조총수와 기병 중심의 특수부대인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또한 1593년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1) 군량에 대해서는 5천 석이든 1만 석이든 있는 대로 조선으로 보낼 것, 20 말먹이인 대두와 된장과 소금 등의 필수품을 가능한 대로 가토의 진영으로 보낼 것, 3) 주문한 조총과 탄약을 급히 조선으로 보낼 것, 4) 병사를 다수 징발할 것, 5) 군량과 무기 조달의 기반이 되는 조세 징수에 대해서는 백성의 미납된 조세를 한 번에 처리하되 보리로라도 징수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기타지마, 42)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긴박한 상황을 대변하고, 이러한 일본군의 상황이라면 예비병력을 일본에 주둔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만 16번대에 편제되어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에 출병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침략을 위해 나고야에 보낸 자신의 병력까지 조선에 보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전투기록은 없지만 도쿠가와와 같은 급의 장수인 다테 마사무네(佐竹義宜)가 조선에 와서 전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유추하면 나고야에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병력은 조선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한국 역사에 기록된 158,700명의 1차 출전 병력만이 아니라 조선 침공을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준비한 286,840명뿐만 아니라 전투가 치열해짐에 따라 더 많은 병력을 보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이전에 준비한 본대와 예비대, 기타 부대 대부분이 조선에 건너와 전투를 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임진왜란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전황이 불리해지고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에 있던 예비대를 거의 대부분 조선에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가정을 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건너와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총 병력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해 준비한 총병력 28만 6,840명일 가능성이 높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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