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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4. 제3기(1592. 10. - 1593. 6.) 진주대첩과 그 후의 조선군 공세 ②

기사승인 2019.12.08  18: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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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전투 준비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대규모 일본군에 맞서 진주성을 방어하는 조선군의 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료가 3,800명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1) 진주목사 김시민은 진주성전투를 차근차근 준비해 왔으며, 자신과 전투를 오랫동안 함께 한 진주관군을 중심으로 전투를 치르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2)

김시민은 진주성전투에 진주성주둔군 3,700명과 이광악 곤양군수의 100명으로 수성군을 편성했다. 3,000명 이상의 경상우도 및 전라도, 충청도 의병이 진주성을 돕기 위해 진주성 주변으로 몰려 왔지만, 김시민은 이들 의병을 진주성 내부로 미리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김시민 본인이 훈련시키고 함께 전투한 경험이 있는 진주성 주둔군만으로도 전투에 승산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주성전투가 임박했을 때 경상우병사 유승인의 진주성 입성을 거부한 것도 김시민 본인이 준비한 전술로 일사 분란한 전투를 치루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시민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를 대리하기 시작한 1592년 5월부터 언젠가는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할 것임을 알고 진주성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3) 진주성이 성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 남강이 흐르고, 서쪽은 절벽이며, 북쪽은 3개의 인공 해자(垓字)로 형성되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 전부터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지휘로 진주성을 확장한 것도 김시민이 진주성에서의 전투준비를 하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김시민이 진주의 지휘권을 갖게 된 이후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시켰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관군에 대한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진주성 수성을 위한 준비를 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1차 진주성전투에 500기의 기마병으로 조선관군의 위용을 보이는 것은 김시민이 전투준비를 치밀하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4) 또한 진주성전투에 앞서 고성, 창원, 거창 등뿐만 아니라 멀리 김산(金山, 현 경북 김천)까지 출격하여 각종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김시민이 전투준비를 위해 군대의 체계를 확립하고 강군을 위한 훈련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김시민은 진주성전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수성의 강점을 살리기 위한 무기를 마련하였다. 대형 화포인 현자총통 170여 대를 만들고,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를 준비하고, 염초 510근을 만들어 놓는 등 진주성전투를 적극적으로 준비했다.5) 성을 수비하는 군대가 대형 화포로 무장되고 현대의 수류탄과 같은 무기가 있다면 임진왜란 당시 성을 공격하는 부대는 막대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질려포, 대기전, 화철, 능철, 궁노, 대궁 등을 사용했다는 기록6)이 있다.

김시민은 진주성 내에서 가능한 모든 인원과 물자를 동원했다. 노약자들과 여자들에게 남자의 옷을 입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웅장하게 하여 일본군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화구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에 싸서 다발로 묶은 후 풀 속에 넣어두고, 성 위에 대포와 대석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시켰다. 그리고 이들 동원 가능한 인원 모두에게 지휘에 따라 행동하도록 철저한 훈련을 시켰다.
 
진주성 외원군
 
김시민이 진주성전투를 진주수성군 중심으로 치렀지만 진주성 밖에 있는 경상우도와 전라도에 있는 조선군 및 의병 병력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차 진주성전투가 발발하고 있던 시점에 진주성 주변에는 진주성 수성군 이상의 조선 전투 병력이 진주성 외곽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진주성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던 조선 외원군이다. 이것은 김시민의 진주성공성전의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진주성 공성전은 잘 훈련되고 지휘체계가 정비된 진주수성군 중심으로 벌이는 한편, 진주성전투 도중에 일본군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전투가 종료된 후 물러가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섬멸하여 경상도 지역 전체를 탈환하려고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제1차 진주성 전투 외원군(外援軍).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물론 진주성 외원군 역시 진주성을 돕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다. 일본군이 진주성에 진출한 10월 5일 이전에 각지의 의병이 진주성으로 몰려왔고, 진주성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진 10월 6일부터 일본군이 물러난 10월 10일까지 진주성 외곽에서 조선의병과 일본군 간의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진 바 있다. 고성의 최의도와 진주의복병장 정유경의 군사 500명, 정인흥과 합천가장 김준민, 그리고 중위장 정방준의 구원병 500명,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의 2,000명, 정기룡과 조경형의 군사 등은 일본군을 후방에서 견제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투도 벌인 바 있다. 즉 1차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김시민의 진주수성군의 공로뿐만 아니라 경상우도와 전라도 의병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낸 성과일 수 있다. 그러나 김시민은 외원군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진주성을 지켜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5일 간의 전투
 
1차 진주성전투는 1592년 10월 4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기 시작한 이후 10월 10일까지 7일 동안 신경전을 벌였고, 5일간 전투가 지속되었으며, 총 10여 회의 회전이 있었다. 진주성 함락을 위한 일본군의 공격도 철저하게 준비되었고, 진주성 수성군 역시 철저한 준비로 전투를 치렀다.
 
5일간의 전투, 10여회의 회전.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10월 5일에는 실제 전투는 없었다. 일본군은 진주성 동쪽 10리 밖에 진을 구축했다. 진주성 안에 있는 조선군과 백성의 기를 죽이기 위해 일본군은 기마병 1,000여 명이 성 주위를 돌면서 군세를 과시했다. 김시민은 이에 대응하지 말라고 훈령을 내렸다. 화살 하나라도 이끼도록 지시했다. 또한 성중에 있는 노약자를 모아 남자 복장을 갖추게 하여 성안에 있는 군세가 크다는 점을 일본군에게 과시했다. 이날 진주성 밖에 있던 윤탁과 정언충이 이끄는 조선군이 진주성을 응원하기 위해 마현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펼쳤으나, 패배하고는 물러났다.

10월 6일 이른 아침, 일본군은 적극적 공격을 위해 3개부대로 나뉘어 공격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일본군 조총수 1,000여명이 성 밖 민가의 문짝과 판자 등을 가지고 나와 성으로부터 100보쯤에 늘어놓고 판자 뒤에 엎드려 일제히 사격했고, 3만여 명의 적이 일시에 고함치면서 성안에 대해 위협했다. 총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성 밖에 있는 집을 뜯어 화살 공격에 대한 방패를 만들고, 대나무로 사다리 만드는 등 공성 준비를 하였다.

김시민은 전투심리 측면에서도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김시민은 일본군이 총과 화살을 쏠 때 일체의 반응을 하지 말도록 하여 탄알과 화살을 아끼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군 기세가 꺾일 때 조선군은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면서 대응하였다. 또한 성 밖에서도 보이는 곳에 조선군 기병 500기로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날 밤 곽재우가 심대승에게 군사 200명을 보내 진주성 배후에 있는 뒷산에서 횃불을 들고 호각을 불며 진주성을 응원하였다. 성안에서도 호각을 불며 같이 호응함으로써 쉬고 있던 일본군을 위협하였다.

10월 7일 일본군은 하루 종일 조총을 사격하고, 활을 쏘며 공격해왔다. 진주성 수성군이 잘 막아냈다. 일본군은 진주성 주변 10리 내에 있는 모든 민가들을 불태워 잿더미를 만들었다. 김시민은 낮에 전투가 끝나고 밤이 되자 악공을 시켜 문루에서 피리를 불게 하여 성안이 안정되어 있다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군 진영에 있는 조선인 아동들이 성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서울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는데 바구니만한 작은 성을 어찌 지키겠는가? 오늘 저녁에 개산 아버지가 오면 너희 세 장수의 머리는 마땅히 깃대 위에 달릴 것이다.”라며 외쳤다. 성 안에 있는 관군과 백성 중에서 이에 격분해서 꾸짖으려 하니 김시민은 그들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군의 심리전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날 밤 달이 지자 일본군이 대나무로 엮어 만든 높은 가건물을 동문 밖에 세우고 흙을 쌓아 높은 언덕을 만들어 성내를 내려 보면서 총을 쏘고, 성 안으로부터의 화살 공격을 피할 곳을 만들었다.

10월 8일 일본군은 나뭇가지와 짚더미로 성 밖의 해자를 메웠고, 대나무 가건물에 바퀴를 달아 밀고 들어오면서 조총과 화살 공격을 하였으며, 흙 둔덕에서 총을 쏘았고,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어 성벽에 기어올랐다. 조선군은 총통으로 대나무 가건물과 흙 둔덕을 파괴하였고,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았으며, 성 위에서 진천뢰(震天雷)와 질려포(蒺藜砲), 바윗돌을 굴렸다. 준비해 놓은 화약을 짚더미에 싸서 불을 붙여 던졌다.

조선군은 자루가 긴 낫을 이용하여 대나무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 위로 올라오는 적을 공격했다. 돌을 던지고, 가마솥에 있는 끓는 물을 퍼붓기도 하였다. 일본군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퇴각하였다. 조선군은 일본군이 공격하지 않을 때에는 화살을 쏘지 않는 등 물자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또 다시 소나무 가지를 성 밖에 쌓아 이것을 밟고 성 안으로 침투하려고 하자 조선군은 진천뢰와 화약을 · 진주성군, 총통으로 산태 파괴

이날 밤 고성 가현령 조응도와 진주복병장 권유경이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강 건너 고개 위에서 십자 횃불을 들고 열을 지어 서서 날라리를 불었다. 성중에서도 북을 울리고 날라리를 불어 응답함으로써 일본군을 혼란시켰다.

김시민은 밤낮으로 전투를 지휘하면서 군사들에게 한 마음으로 같이 죽자며 군사들의 사기를 충전시켰다. 김시민은 몸소 물과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군사들의 허기와 목을 채워주었다. 김시민은 성을 보전하지 못하면 성중에 있는 모든 조선백성들은 일본군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니 성을 사수해야 하고, 죽을 각오로 싸운다면 이길 것이라고 전의를 불태웠다.

10월 9일에도 전날과 같이 공격을 반복했다. 이 날에는 진주성 외곽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을 공격했다. 김준민이 단성현 쪽에 있는 일본군을 기습했고, 한후장 정기룡과 조경형 군대가 살천 방향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김성일의 응원 요청을 받고 달려온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와 임계경의 군사 2,000여 명이 성을 포위한 일본군의 후면을 압박했다.

10월 10일 새벽 일본군은 여기저기 모닥불을 붙여 환하게 밝힌 가운데 군막을 철거하고 모든 자재들을 수레에 실어 퇴각하는 척 하며 몰래 동문 가까이 접근하였다. 일본군들은 긴사다리를 이용하여 성벽에 기어올랐고, 일본기병들은 뒤에서 성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이 나뉘어 군대를 지휘하며 격전을 치렀다. 동시에 일본군 다른 부대가 북문을 공격하였다. 전만호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막아냈다. 형세가 급박해지자 성 안에 있던 노인과 여자들도 돌을 던지며 방어를 도왔다. 동녘이 밝아오자 일본군의 공격이 점차 누그러졌다.

이때 김시민이 왼쪽 이마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곤양군수 이광악이 목사를 대리하여 군대를 지휘했다. 오전 9시 경 일본군이 물러갔다. 일본전사에는 1차 진주성전투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등이 10월 5일 진주성을 포위했다가 10월 11일 포위를 푼 것으로만 기술하고 있다.

전투가 끝날 때 고성의병장 최강, 이달 등이 군사를 영솔하고 진주성을 구원하러 왔다. 곽재우도 군사를 보냈고, 정인홍도 가장 김준민, 정방준 등에게 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을 구원하라고 하였다. 김준민은 진주성으로 오던 중 일본군과 싸워 수급 수십 개를 베었다.

1) 오종록, 2010, 「진주성 전투의 지휘체계와 전투과정」,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98; 최효식, 2010, 「1,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과 승패의 요인」,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113; 박성식, 「1, 2차 진주성 전투의 실상과 그 영향」,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135. 등.

2)“이튿날에 선봉 천여 기(騎)가 진주 동봉(東峯) 위에 달려왔다가 돌아가다.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이 싸움에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려와서, 성에 들어가 함께 지키기를 원하니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에 들어오면 이는 주장(主將)을 바꾸는 것이니, 반드시 통솔하는 방법이 어긋나서 서로 합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거절하고 들이지 않으며, “적병이 이미 어울렸으므로 성문을 엄하게 경계하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열고 닫으면 갑자기 침입할 염려가 있으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을 함이 옳습니다.” 하다(조경남, 1593, 󰡔난중잡록[亂中雜錄]󰡕, 권2, 1592년 10월 2일자).

3) 강성문, 2010, 「진주대첩을 통해서 본 김시민의 전략과 전술」,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286.

4) “목사(牧使)는 성중(城中)에 명령을 내려 적을 보아도 못 본 체하게 하고 탄알 한 개나 화살 한 대라도 함부로 허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성 안의 기병 500여 명으로 하여금 적이 보이는 곳에서 힘차게 돌진하게 하였습니다“(김성일, 1649,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5) “목사는 변란이 일어난 뒤로 국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염초(焰硝) 150근을 미리 구워서 만들었으며, 대충 왜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총통(銃筒) 170여 자루도 주조하였으며, 별도로 재간이 있는 경내의 사람들을 뽑아서 항상 총쏘기를 연습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에 임하여서는 화약 쓰기를 물 쓰듯이 하면서 섶이나 짚에 싸서 성 밖에 던지기까지 하였으며, 잇달아 철환을 터뜨려 대적을 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김성일, 1649,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6) 김성일, 1649,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7) 임진왜란 때 쓰던 작은 대포의 한 가지로 차대전(次大箭)이란 화살 끝에 화약 주머니를 매달아서 쏘는 것이다. 현자총통은 보통 철환 100발을 한 번에 발사하는 것으로 가까운 곳에서는 산탄 효과가 매우 커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8) 선조(宣祖)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폭탄으로, 화약, 철편(鐵片), 뇌관을 속에 넣고 겉을 쇠로 박처럼 둥글게 싸서 대완구(大腕口)로 쏘아 목적지에 투하하는 것이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고도 한다.

9) 탄환에 마름쇠를 넣어서 쏘는 화포로, 고려 말기에 최무선(崔茂宣)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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