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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24.알려진 역사, 알아야 할 역사 ④

기사승인 2021.07.24  00: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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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조는 무능한 군주였나?
 
[박희봉 중앙대 인재공공학부 교수} 임진왜란을 생각함에 있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국왕인 선조의 결단력 부족과 무능, 무책임이다. 각종 사극에서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국왕, 신하에 업혀서 피난 간 국왕, 끼니를 굶고 비를 맞는 국왕,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국왕, 신하의 승리와 백성의 신망을 시기하는 국왕 등으로 묘사되어 왔다.

임진왜란을 맞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백성을 피폐하게 한 책임을 국왕이 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선조는 국왕으로서 임진왜란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여기에서는 선조가 임진왜란 과정에서 국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보겠다.

1590년 1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조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에 전쟁을 선포한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선조는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라고 조정에 명을 내렸다. 선조는 일부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명나라 황제에게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점을 알렸고, 임진왜란 1년 전부터 호남과 영남의 성곽을 구축하라고 명하였다.

1592년 2월 임진왜란 2개월 전에는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이일은 호서와 호남으로 가서 병기와 시설을 점검하였고, 신립은 경기와 해서를 점검하고 한 달 뒤에 돌아왔다. 또한 변방의 사정을 아는 제신을 골라 하삼도를 순찰케 했다.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로 삼고, 윤선각 일명 국형을 충청감사로 삼아 병기를 준비하고 성곽을 수축케 하였다.

특히 경상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조정에서 전쟁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의 지역은 성곽 및 참호를 증축 또는 축조하였다. 이순신과 같은 인재를 발탁하여 해전에 대비하였다.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순신이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비롯한 전함을 축조하였으며, 성곽을 보수한 것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진주대첩의 기록에서 보듯이 김시민이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대포와 화약을 준비하였으며, 성곽을 보수한 것도 조정의 전쟁준비 명령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조정은 일본군 침공에 대한 방어전략을 마련하였다. 일본군이 침공하면, 일차적으로 부산성과 동래성, 밀양성, 김해성 등에 주둔하고 있는 상비군으로 방어하고, 다음으로는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경상도지역 및 충청도지역의 고을 수령들이 병력을 모아 대구와 충주에 집결한 후, 중앙에서 지정한 순변사의 지휘를 받아 일본군을 물리친다는 계획이다.

실질적으로 일본군이 침입하자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대구로 파견하였으며, 곧이어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충주에서 방어에 임하게 하였다. 또한 조경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서로(추풍령)를 방어하게 하였고, 성웅길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동로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죽령을 방어하게 하였고, 변기를 조방장에 임명하여 조령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계획이 일본군의 진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긴 했지만 조정이 일본군의 침공에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임명하면서 어도를 하사하고 군통수권을 부여하였으며, 당시 말을 타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신립에게 맡겼다. 심지어는 국왕을 수행하던 내시까지 신립과 함께 충주로 보냈다.

이로써 일본군이 한양성에 들이닥칠 때에는 한양성을 방어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고, 선조의 피난 행차에 호위군사도 없게 되었다. 선조는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의 보전과 침략군 퇴치를 우선시한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일본군이 한양성으로 다가올 때 선조는 일단 난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왕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기라도 한다면 조선은 나라 자체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피난 중에도 선조는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교서를 8도에 보내고 초유사를 각 도에 보내어 의병이 일어나도록 종용하였다.

6월 15일 평양성이 함락된 후 국왕인 선조는 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휘하였다. 선조는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과 왕세자인 광해군으로 조정을 분조하였다. 선조와 광해군이 모두 왕권을 가지고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겠다는 의도이며, 선조가 사망하는 경우에는 광해군이 왕권을 이어받아 조선의 정통성을 유지하도록 하겠다는 의도이다.

선조는 각 지역의 전투상황을 점검하여 전투에 승전한 장수들에게 직위를 높여주는 등의 전투 지휘를 하였다. 함안군수 유승인이 창원전투에서 승전하자 경상우절도사로 임명하였고, 경상우도의 각종 전투에서 승전한 김시민 진주판관을 진주목사로 임명하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선조는 의주에서 전국 각 지역에 초유사를 파견하였고, 초유사들은 전국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관군과 의병간의 역할을 조정하였으며, 각 지역의 병력과 병량을 배분하도록 하였다. 또한 선조는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봉기한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고, 의병대장에게 관직을 제수함으로써 의병부대도 관군으로부터 무기와 식량을 지원받고, 심지어는 지역에 조세를 징수함으로써 병량을 자체적으로 보급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포위당하였고, 결국 함락당한 후에도 선조는 진주성을 응원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조선실록에 나와 있다. 그리고 선조는 명군과 일본군 간의 화의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화의협상을 반대하였다.

선조가 백성을 남긴 채 한양성에서 북쪽으로 피난을 떠난 무책임한 군주라는 평가는 수정되어야 한다. 당시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 선조가 국가의 보전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군주였다면, 선조는 자신을 호위할 무사를 충분히 한양성에 남겼을 것이다.

또한 선조가 한양성에 남아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지휘하다가 포로가 되기라도 했다면 당시 실정으로는 전 조선백성은 일본군에 항복을 하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됐을 것이다. 국란을 당해 선조를 중심으로 조선백성 모두가 일체가 되어 일본군과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기에 임진왜란이 극복된 것이다.
 
5. 임진왜란, 갈등의 조선인가? 통합의 조선인가?
 
임진왜란에 대해 한국인은 조선의 갈등과 분열로 인식하고 있다. 갈등과 분열에 의해 전쟁을 대비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각종 전투에서 지속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분열과 갈등의 국가였다면 국란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회갈등의 요인인 지역갈등, 계층갈등, 정치이데올로기 갈등이 임진왜란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논의하겠다.

첫째, 임진왜란을 겪던 시절 조선에 지역갈등이 있었을까? 지역갈등이 있었다면 지역간 유기적 협력이 불가능하고 각종 전투에서 더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각종 전투에서 조선인은 지역을 초월하여 협력함으로써 전투를 효과적으로 치렀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와 경상우도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은 것에서 당시 조선인의 지역을 초월한 협력을 살펴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에 따라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는 일본군 제6번대는 금산(錦山)에 본영을 두고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일본군 6번대는 웅치를 돌파하고 전주성 앞까지 진출하였다가 돌연 금산으로 회군하였다.

이것은 고경명이 전라도에서 거병하여 한양성으로 출진하다가 금산성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이 부대가 전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배후를 공격한 것이다. 또한 일본군 6번대는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경상도로 돌아 진격하다가 경상우도에서 활약하고 있던 곽재우(의령 거점), 정인흥(성주 거점), 김면(거창 거점) 등의 의병군에 의해 차단당했다. 이것은 조선군 및 의병 간에 상호 긴밀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일본군의 이동상황과 전시사정 등에 서로 연락하면서 전투에 임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부산성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 당했다는 사실을 이순신이 이틀만에 전해 듣고 있다. 해전에 있어서도 경상도 수군은 경상도에서만, 그리고 전라도 수군은 전라도에서만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합함대를 이루어 전투에 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한 달이 넘기도 전인 1592년 5월 7일 전라좌수영의 이순신함대(여수 수영)와 전라우수영(해남 수영)의 이억기함대가 연합하여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해전을 치렀다. 이후에도 전라도 연합함대는 경상우수영의 원균함대와 연합하여 사천해전과 한산대첩 등의 연전연승을 이끌었다.

1592년 10월에 벌어진 1차 진주성전투, 즉 진주대첩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조선군은 진주주둔 관군이었지만 진주성 인근에 진주성을 후원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외원군이 모였다. 능주(현 전남 화순군) 출신인 최경회는 의병 2,000명을 이끌고 전라도에서 단성까지 와서 합천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지역으로 전진하였으며, 남원 출신 임계영도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양까지 진출하여 전투를 벌였다.

비록 용인에서 패전하였지만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서 거병한 8만명의 남도근왕군은 자신의 출신지역을 넘어 한양성으로 진출하였고, 나주에서 거병한 김천일은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의 경상우도 의병군이 성주성을 공격할 때에도 최경회와 임계영이 이끈 전라도 의병이 대거 참여하였다. 또한 수원 인근에 있는 독성산성전투와 행주대첩은 권율이 이끌던 전라도 관군이 주축이었다.

특히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전라도 출신 의병장과 충청도 의병장들이 지역 의병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고, 결국 모두 전사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일본군 9만여명이 몰려오고 있기에 전투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지역, 타지역을 가리지 않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각지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2차 진주성전투를 사실상 끝까지 지휘하다 전사한 창의사 김천일은 나주 출신이며, 김천일과 함께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화순 출신이고, 충청병사 황진은 남원 출신이며, 복수의병장 고종후는 장흥 출신이고, 태인의병장 민여운은 태인 출신이며, 도탄의병장 강희보는 광양 출신이다.

또한 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양산숙은 나주 출신이고, 황대중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강진 출신이다. 그리고 충청도 출신 조선관군 및 의병장도 2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한다. 김명세는 해미현감, 윤구수는 태안현감, 송제는 당진현감, 이의정은 보령현감, 정명세는 해미현감이었다.

한마디로 임진왜란 시 각종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지역 주둔군 및 의병이 일본군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필요할 때에는 타지역으로 원정하여 전투를 벌였고, 관군과 의병 상호간에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은 지역갈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지역이 위급할 때에는 다른 지역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투에 참여하였고, 함께 전사하는 등 국가통합을 이루고 있었다.

둘째,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를 비롯한 각종 전투에서 조선인은 계층과 세대, 남녀 갈등을 넘어, 각자가 모두 국란을 극복하기 위해 결사항전함으로써 전쟁에 있어 생존과 승전을 향한 국가통합의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의병은 관군이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 패배하자 자발적으로 전투에 가담했다. 전투에 가담한 의병은 양반과 농민, 천민 등 계층의 구분이 없었다.

일본의 경우 한 지역의 주둔군이 점령군에게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항복하는 경우, 해당 지역의 백성들은 점령군의 통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조선관군을 상대로 거점지역에서 승리하면 조선 8도 전지역을 어려움 없이 통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1)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조선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백성들은 모두 일본군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제1차 김시민이 진주목사 대리를 맡게 된 후 우선적으로 한 일은 성채를 보수하고 군사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는 것뿐만 아니라 진주성민을 안심시켜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군대는 백성을 지키고, 백성은 군대를 믿고 군대를 지원해야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시민은 전투 전에 노약자들과 여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웅장하게 함으로써 일본군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가하였고, 2) 전투과정에서도 성내에 있는 일반 백성들이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무기와 돌을 나르는 등 협력을 받았기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을 함락한 이후 성안의 모든 조선인을 남김없이 죽이라는 명령을 하달한 데에는 이같이 1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안의 일반백성들이 계층과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결사항전하였기 때문이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도 계층과 남녀노소와 상관없이 전체 진주성 백성들이 전투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군 9만 3,000명이 몰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성 내 백성들은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진주목사였던 서예원이 전투 경험이 많은 의병장 김천일에게 실질적인 전투지휘권을 이양한 것은 전투에 대한 승리가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의병장 최경회는 당시 61세였으며, 김천일은 56세에 전사했다. 또한 적장을 안고 진주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당시 19세에 불과하였다. 계급갈등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남녀노소의 차이도 결사항전의 의지를 모으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셋째, 임진왜란 당시 동인과 서인의 정치이념 갈등에 의한 당파싸움이 치열했을까? 조선 조정의 정치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이 치열했고, 이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했을까? 동인과 서인의 갈등으로 비쳐지는 논란은 임진왜란 준비의 방법에 있어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정사 황윤길은 서인으로서 곧 일본의 침략이 예상되므로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부사 김성일은 동인으로서 일본의 침략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민심이 동요되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였다.

이를 조선 조정의 정치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전쟁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사소한 논쟁을 당쟁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후세에 조선왕조의 역사를 당쟁의 역사로 보고, 조선의 통치력을 축소하려는 편협한 역사관에 따른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과 대립이 심각하게 발생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또한 임진왜란 직전 동인과 서인 모두 일본의 침입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는 것은 극단적인 일면을 너무 과장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1년 전부터 침략하겠다는 전쟁선포를 하는 서신을 보냈다.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나름대로 전쟁을 준비하였다. 성곽을 축조하고,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무기를 준비하였다.

진주성의 경우만 보더라도,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진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었고, 진주판관 김시민은 500기 이상의 기병을 준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김시민은 오랫동안 전쟁준비를 계획적으로 준비하였기에 진주대첩의 승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함안군수 유승인이 기병 1,000여기로 임진왜란 초기부터 경상도 남부지역의 해안도시에서 전투를 벌였고, 탄금대전투에서 신립이 기병 8,000기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기록이 있다. 1593년 초 조선의 병마 상황을 점검한 기록에 조선이 보유한 군마의 수가 17만 2,400기라고 되어 있다.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전쟁준비 상황 역시 조선 조정의 일치된 전쟁준비 태세를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수군은 박홍이 이끄는 경상좌수영,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으로 체계화되었고, 각 수영마다 수군 160여명이 승선하는 판옥선 25척, 80명 정도가 승선하는 협선도 25척 정도씩 배치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충청수영을 제외하고도 판옥선 100척, 협선 100척 등으로 수군 총수는 2만 4천명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꾸준히 무기를 점검하고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틀 전에 거북선 출동훈련을 하는 등 전쟁준비를 실질적으로 준비하였다.

이것은 조선 조정이 전국적으로 육군과 수군을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를 전국적으로 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당쟁에 의해 의견이 분열되었다면 이렇게 전국적으로 전쟁준비가 이루어질 수 없다. 국론의 분열로 임진왜란에 대한 국가적 대비가 전혀 없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이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인식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진왜란 당시 조선은 분열과 갈등의 상태였다기보다는 국가통합에 의해 국란을 극복한 것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100년 동안 국내에서 각종 전투를 경험한 일본군이 20만명 이상의 압도적인 병력과 신무기를 장착하고 200년에 걸친 평화 시기를 보내고 있던 조선에 쳐들어와서 전투경험이 부족한 조선군을 상대로 초기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군과 조선백성은 국란을 맞아 최선을 다해 침략군과 맞서 싸웠다. 조선백성 모두가 점령군 일본군의 통치에 응하지 않았다. 조선백성은 일본군의 병력차출에 응하지 않았고, 병량을 제공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전국으로 분산되자 전국적으로 조선백성의 항전이 발생했다. 일본군이 주둔한 거점지역 밖에서는 일본군이 활보할 수 없도록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했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전투가 지속되자 조선백성은 군대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싸워 이겨냈다. 정암진전투, 무계전투, 영천성전투, 청주성전투, 성주성전투, 북관대첩 등은 자발적인 의병을 주축으로 조선군이 지원함으로써 승리한 전투이다. 연안성전투, 경주성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 등은 조선관군을 주축으로 조선백성이 지원함으로써 일본군의 주력부대와 싸워 이긴 전투이다.

이 전투는 모두 국란을 이겨내야 한다는 조선인이 국가통합을 이루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은 결코 갈등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 준비에 임함으로써 결국 일본군을 물리쳐 이긴 것이다.

1) 일본 내부 전투에서는 군대 간의 전투가 종결된 후에는 일반백성들은 승리한 군대의 백성이 되는 것이 상례였다.
2) 박익환, 2010, 「임진년 진주대첩에서의 학봉과 김시민의 공업」,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235.
3)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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