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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흥망성쇠,우리나라 경제를 세계화시킨 선구자

기사승인 2019.12.10  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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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제조’ 이병철 회장, ‘건설’ 정주영 회장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재벌 신화의 한 사람인 ‘무역’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83세.

[전영준 푸른한국닷컴 대표기자] 김우중 전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숙환으로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
 
김우중 전 회장은 작년 12월 말부터 증세가 악화돼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에 장기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다.

김우중 전 회장은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바로 위 형이 경제학자이자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을 지난 김덕중 전 서강대 교수다.
 
부친은 제주 출신인 김용하(1896∼1950년?) 전 제주도지사로 대구사범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장을을 역임했다. 대구사범학교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 분의 제자다.
 
김용하는 제주도 애월읍 하귀리 출생으로 평양제2고보를 나와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제2회)를 졸업하였다.
 
함경북도 종성중학교의 교사, 대구 사범학교 교장, 경성공립사범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학생과장,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서울로 이사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우중 전 회장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김우중 전 회장 정희자 부부 사이에는 1990년 24세의 나이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장남 김선재 씨가 있었다.

그런데 4년 뒤 TV에 등장한 한 연예인이 아들과 닮았다며 부인 정희자 씨가 호감을 갖게 됐는데 바로 배우 이병헌이었다.
 
이후 김우중 전 회장 부부는 먼저 연락을 취해 양아들로 인연을 맺었다. 이병헌은 대우통신 컴퓨터, 대우자동차 티코 등의 광고 모델을 맡기도 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경기고 52회며 동기생으로 배우 신구,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고건 전 국무총리,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등이 있다.
 
그는 학창시절 선도부장이었으며 이종찬과는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서울대 갈 때 김 전 회장은 경기고에서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김우중 세계경영
성장
 
김우중 전 회장은 다른 재벌들이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이 남기고 간 자산으로 성장했던 것과 달리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1960년대 산업화 이후 대규모 기업집단을 일군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또한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그룹을 확장해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로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김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1963년 친척이 운영하는 한성실업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31살 청년시절인 1967년 서울 충무로에 자본금 500만원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김 전 회장은 당시 한국의 주 생산품목이던 섬유·의류 등을 수출했다. 회사를 창업하자마자 트리코타 원단 1년 생산량에 해당하는 약 60여만불의 오더를 수주해 감짝 놀라게 했다.

대우는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설립하는 등 초창기부터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다. 지난 1975년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에는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 창구 역할을 했다.
 
김우중 전 회장을 양아들처럼 생각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는 증권·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70년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에 발맞춰 중공업·조선·자동차 등으로 그룹의 외연을 넓혔다.
 
김우중 전 회장은 지난 1973년 대우건설, 1974년 대우전자, 1976년 한국기계, 1978년 대우조선 자동차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해 경영 정상화를 이뤄내면서 '대우그룹'의 기틀을 구축했다.

김 전 회장의 대우는 한국기업으론 독보적으로 동유럽, 중동·아프리카·남미 등에 진출했다. 이즈음(89년) 펴낸 책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다. 출간 당시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려 최단기 ‘밀리언 셀러’ 기네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1993년 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 시장 개척에 주력해 수단과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시도하는 등 계속 해외에서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나갔다.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이후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그룹은 30여년 만에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보유하고 국내서 10만명, 해외서 25만명을 고용하며 21개 국가에 진출했다.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1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으로 현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몰락
 
대우그룹은 IMF 당시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7년 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 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에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했지만 삼성의 소극적 태도로 둘 다 실패했다. 결국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 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 두고 사업 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부채가 500억 달러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당시 대우그룹의 해체에 대해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있다.
 
김우중 전 회장은 후일 회고록을 통해 당시 김대중 정부 고위 관료들과 갈등으로 인해 그룹이 결국 해체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금감위원장으로써 한국의 구조조정을 맡았던 이헌재 전 부총리는 지난 2012년 1월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대우가 해체된 건 1999년 7월까지 대우가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며 "자산매각이든 외자유치든 5대 그룹 중 꼴찌였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우중 전 회장은 1999년 11월 해외로 출국 이후 5년 8개월간의 해외로 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입국하여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아울러 김 전 회장은 21조원대 분식회계와 9조9800억원대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기소되어 2006년 1심에서 징역 10년, 추징금 21조4484억원을 선고 받았다.
 
김 전 회장은 2006년 11월 3일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천 253억원의 형을 받았지만 항소를 포기하여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2007년 12월 31일 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대우의 몰락에는 김우중 전 회장의 스타일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우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주)대주그룹 홀딩스 대표이사는 2005년 10월28일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우, 현대, 삼성의 오너 스타일에 비교 설명을 했다.
 
그는 “김우중 회장님은 모든 일을 혼자 다 하는 스타일이다. 혼자 결정해서 명령하시고, 또 너무 똑똑하다. 특히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은 대단하다. 그런 면에서 대우와 현대가 비슷하다. 그러나 인간이 신은 아니니까, 그러다보면 판단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 '총수의 독단적 결정'을 견제하고 제동을 걸 장치가 없었다”는 질문에 그게 구조조정본부의 역할이다. 회장님을 견제하고 참모 역할을 해야 했는데, 그게 약했다. 삼성은 구조조정본부 역할이 강했다. 우리 회장님은 '도전, 창조'인데, 삼성 총수의 경영 스타일은 '경청'이다. 그러니 삼성의 구조조정본부가 역할을 많이 하게 되고, 힘이 강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회장님은 혼자 경영하시면서 문제 해결책을 찾고, 현장도 직접 지휘한다. 그런데 온정이 많다. 그래서 아래 직원들이 잘못해도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못하고 온정을 베풀었다. 그런 점이 인력 구조조정 면에선 단점이 될 수 있다. 근데 정주영 회장님은 그런 면에 대해서는 인력 구조조정도 하고, 칼날같이 경영했다”고 비교 평가했다.
 
정치
 
김우중 대선출마 보도기사.사진@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캡처
김우중 전 회장의 몰락에는 정치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한테는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친구인 이종찬 전 민정당 사무총장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노태우 정권시절에도 노태우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외교와 김 전 회장의 동구권 무역과 코드가 일치해 정권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 3당통합으로 정치지형이 변했다. 군사독재정권시절처럼 맹목적으로 도와주던 세력들이 하나 둘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자구책으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 두 달 전까지 대선 출마를 생각하기도 했다.
 
대우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주)대주그룹 홀딩스 대표이사는 2005년 10월28일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우중 전 회장의 대선출마 결심과 포기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김우일 대표이사는 "워낙 재벌에 대한 규제가 많아, (정부가) 부동산을 팔라고 하고 비주력업종이니 진입을 규제한다고 하자,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대통령 후보 출마를 결심했다는“고 밝혔다.
 
이어 “당시 검토해보니 김우중 회장의 학교 인맥과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독자층, 대우인맥을 봐 500만 표 정도의 계산이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민자당에서 대선 출마를 포기하지 않으면 세무조사에 들어간다고 압박이 왔고, 그래도 출마 의사를 꺾지 않자, 실제 세무조사가 이뤄졌다. 안 걸릴 재간이 없었고 700억 정도의 세금이 추징될 상황에 처하자,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출마 의사를 접었다.”고 설명했다.
 
김우일 대표이사는 기업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전두환 정부 시절엔 정부 말 한 마디면 부실기업 인수가 결정"되는 방식으로 강압적이었고, 노태우 정부 시절엔 "비업무용 부동산이 많으니 팔라"고 흘리면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김영삼 정부 시절은 "은근히 종용하는 스타일" 김대중 정부는 "수수방관하듯" 개입이 줄어든 스타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우중 전 회장도 1992년 3월2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업과 정치의 관계를 설명하며 기업인의 정치참여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김 전 회장은 “기업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며 당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등 기업인들의 정치참여를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 전 회장은 “국내 현실은 기업인이 기업 일만 잘하려 해도 어려운 형편”이라며 “기업이 자기 일을 다한 다음 정치에 나선다면 또 모를 일이다. 자기일을 1백%잘했는지 되돌아 봐야한다”며 기업인의 정치참여를 비판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1995년 경 “일본의 ‘마쓰시타정경숙’과 같은 정치인 양성기관을 만들겠다”고 밝혀 정치참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현재 국내정치는 나라안에서만 티격태격하는 꼴이고 한마디로 지도력의 부재상태”라며 현실정치를 강력히 비판했다.

이어 “각계에서 정치에 뜻을 둔 30,40대의 올바른 인사를 뽑아 3년정도 정치기본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이며 고르바초프와 같은 국제적인 정치인·석학들을 초빙 강연,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정치지도자를 기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우중 전 회장은 “국내 현실은 기업인이 기업 일만 잘하려 해도 어려운 형편”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기업 일만 아니라 정치참여에도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왔다.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가 해체된 것은 꼭 IMF가 아니라 정치에 관심을 갖을 때부터라고 해야 정확하다 할 수 있다.
 
업적
 
김우중 회장은 한때 정주영, 이병철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재벌 신화 중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거대 경제 범죄자와 망한 사업가 이미지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풍랑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했지만 대한민국 경제에 남긴 흔적은 우리나라 기업풍토를 바꿀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 기업에 무역을 가르쳐 주었다.
 
김우중은 전 회장은 삼성과 현대가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국내에서 물건을 만들고 파는 일에 안주할 때 그는 창업초기부터 세계로 눈을 돌렸다. 즉 무역을 하면 더 돈을 벌 수 있고 무역을 해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는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 동원 능력기법을 활용해 돈이 없어도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무역역군이 되게 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수출입 기업이 국가간의 무역 거래나 이와 결부된 국내 거래에서 필요한 자금을 국내외 금융기관이나 거래 상대방이 시중은행보다 낮은 이자로 빌려주는 무역금융제도를 활용해 기업을 발전시킨 선도자다. 

증권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전산화를 선도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70년 동양증권을 인수해 1983년 대우증권으로 사명을 바꾼 후 대한민국 최고의 금융투자 전문기업으로 만들었다.
 
단순히 주식거래만을 하던 증권업을 탈피해 투자매매, 투자중개, 투자자문, 투자일임, 신탁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홍콩·뉴욕·런던·싱가포르·인도네시아에 현지법인을 세워 유가증권 위탁 매매와 고유재산 매매, 기업 인수와 인수 주선 등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했다.
 
또한 1984년 국내 최초 민간인 연구소인 (주)대우경제연구소 설립해 체계적인 경제분석을 통해 고객들에게 주가예측 서비스를 제공했다.
 
대우증권은 증권 전산 시스템 구축의 선구자로 실시간 주식 시세 분석 및 조회 시스템을 구축해 사용자에게 조회 서비스를 제공했다. 대우증권의 전산팀은 증권회사 사관학교로 이곳을 거쳐간 많은 인재들이 증권회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대한민국의 조선과 건설을 글로벌화 시켰다.
 
김우중 전 회장은 자신의 스타일답게 건설도 해외로 돌리는 데 큰 기여를 해 우리나라 건설업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는 망했지만 아직도 대우건설이 존재하는 것은 김우중 전 회장의 공이다.
 
대우건설은 1973년 11월에 대우그룹이 대우실업과 영진토건사를 인수하며 설립됐다. 이후 1976년에 해외 건설업 면허를 취득하면서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나섰다. 그 해 남미 에콰도르, 1977년 아프리카 수단, 1978년 리비아에 진출했다.
 
1980년대에는 국내 산업이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방향을 틀게 됐고, 이에 발맞춰 발전소 건설이 요구되면서 1981년에 울산 화력발전소 4, 5, 6호기를 준공했다.
 
1982년에 대우실업을 통합해 같은 해 건설기술연구원을 설립했다. 1988년 미국 시장에 이어 알제리, 라오스, 말레이시아 건설 시장에도 진출했다. 이는 무역전문 회사인 대우실업의 인력을 활용한 덕택이다.
 
김우중 전 회장이 세운 대우조선해양은 각종 선박과 해양플랜트, 시추선, 부유식 원유생산설비, 잠수함, 구축함 등을 건조하는 세계 최고의 조선해양 전문기업이 되었다.
 
김 전 회장은 1978년 대한조선공사가 옥포조선소를 인수해 '대우조선공업'을 만들었다. 창립 후 1981년 옥포조선소를 준공 후 1984년 선박해양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1992년 대한민국 최초 전투잠수함인 이천함을 건조하였고, 이 전투함은 다음해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김우중 전 회장의 평가는 북방무역을 빼면 이야기 할 수 없다. 세계사 조류에 편승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글로벌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중~후반 동유럽의 민주화, 시장 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현지 진출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1990년대에는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구 공산권 국가에 진출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기지였던 폴란드는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있을 정도로 동구권에서는 김우중과 대우는 전설이었다.
 
김 전 회장은 말년에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가며 후진들 양성에 전념했다.
 
2014년 8월 26일에 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 재기의욕을 담은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해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 기타

김우중 전 회장은 대한축구협회 회장(1987년-1993년)과 바둑을 좋아해 한국기원 총재(1983-1990), 전경련 회장(1998-1999)등을 역임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경쟁력이 있어야 해외에 진출할 수 있다’는 종전 이론을 뒤집어 ‘해외에 진출해야 경쟁력이 생긴다.’라고 역발상을 발휘했다.
 
‘기술이 없으면 사오면 된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는 식의 발상의 전환을 통해 기업을 일구었다.
 
일본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돈으로 기술을 사 IT왕국을 만든 것을 보면 김우중 전 회장의 혜안이 얼마나 빛났는 지를 알 수 있다.
 
김우중 전 회장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세계적, 도전적, 진취적 기업인이었으며 기업사에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전영준 dugsum@nate.com

<저작권자 © 푸른한국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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