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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5주년 [1], 한국판 벌지전투 지평리 전투

기사승인 2015.06.21  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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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부대와 한국판 벌지 대전투

[고성혁 군사전문기자 ]2차대전 막바지 히틀러 최후의 도박인 벌지 대전투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전쟁영화의 단골메뉴이기도 합니다. 독일기갑의 군가인 팬쩌리드로 유명한 <벌지대전투>는 당시 전투를 리얼하게 묘사한 영화로서 아마 밀리메니아라면 다 보았을 것입니다.

또 최근에 벌지대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는 BAND OF BROTHERS가 있습니다. 후반편에 101공정사단이 벌지전투의 최고白眉인 바스토뉴사수작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미 101공정사단이 악착같이 싸워 이긴 바스토뉴사수작전과 거의 똑같은 전투가 한국전에서도 있었습니다. 또 그것은 결전부대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결전부대가 버티고 있는 양평 지평리에서 그런 전투가 625때 있었습니다. 그 전투는 아시는분만 아시는 지평리 전투입니다.

유럽의 바스토뉴가 미군의 악전고투로 지켜졌다면 양평 지평리는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프랑스군(대대편제)에 의해서 사수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바로는 프랑스군이 625전쟁중 지평리전투승리 이후엔 한번도 승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를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하여간 지평리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투혼은 미해병1사단의 투혼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시기적으로도 지금과 비슷한 시기(1951년 2월)에 전투가 있었습니다.그런데 왜 지평리 전투가 벌지전투하고 비슷할까요?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벌지대전투의 장면들

 

   
▲ 상:무슨 장면인지 아시죠? 헤스대령인가요? 신병 애송이 데리고 무슨 전투를 하라고 하냐고 장군에게 따지니까 장군이 신병을 찬찬히 흟어보면서 그럽니다."애들이라고 해도 전투 한번만 치루면 다 어른이 될걸세...." 그리고 좀 있다가 발지전투의 주제곡이 흘러나오죠,하:헤스대령의 참모 영화 발지대전투중에서 인상에 남는 인물입니다.
   
▲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장면들.바스토뉴에서 포위된 미 101공정사단의 후방 야전병원모습.
   
▲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 바스토뉴전에 갓 배치된 병사가 전사하는 저 장면.각인되는 명 장면입니다.
   
▲ 발지전투의 실제 주인공인 파이퍼 중령입니다.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미군을 공포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후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 발지전투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진.좌:전의에 찬 독일군.우상:기갑의 진격을 찍은 역사적 사진.우하:영화 발지대전투에서 독일 타이거 탱크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는 미군
   
▲ 위 상황도는 발지전투시 독일기갑에 포위된 바스토뉴의 상황도.밑에 지평리전투 상황도를 보면 흡사하다.
   
▲ 위 한국전때 지평리 전투 상황도는 결전부대 OO대대 건물 복도에 전시된 사진.
   
▲ 구글 위성사진지도와 위의 작전지도를 서로 비교해 보면서 당시 중공군이 어떤 경로로 포위공격을했는지 살펴 보면 보다면 보다 입체적으로 알수 있다.
우리 속담에 초상집에 문상하고 나서 누가 죽었냐고 물어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면 안되듯이 무릇 군사메니아라면 또 군작전을 이야기 할때는 최소한 그곳의 위치는 알고 가야 하겠지요?

상황도를 비교해 보면 바스토뉴 포위상황도와 거의 흡사합니다. 결전부대에서는 저렇게 한국전의 상황도까지 전시하면서 병사들에게 아군 부대와 연관된 전쟁사를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양평 지평리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입니다. 바로 저곳에서 한국전 당시 엄청난 전투가 치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 곳에 떡하고 버티고 있는 우리의 부대는 결전부대 00대대입니다

최대한 쉽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말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어떡하면 전쟁이나 전투상황을 알기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끝에 찿아 낸 것이 구글어스를 통한 입체적 상황전개입니다. 지금부터 지평리 전투를 구글어스를 통해서 입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중공군이 1951년 2월공세를 보여주는 상황입니다. 미군 23연대에의 전면에 걸쳐서 중공군의 3개 사단이 집중공세를 가하였습니다.

 

   
▲ 51년 2월의 중공군 공세
2. 중공군 3개사단의 집중공세에 미군 23연대는 급속히 전선이 붕괴되었습니다. 오직 프랑스 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지평리만 빼고 말입니다.

결국 미군 23연대에 배속되어 있던 프랑스 대대만이 진지를 고수하였던 반면에 프랑스대대 주변의 양익(좌익 우익)의 전선이 중공군의 공세에 허물어 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평리의 프랑스 대대만이 돌출된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선에서 돌출된 부분을 "벌지'라고 합니다. 2차대전당시 생비트, 바스토뉴가 위치하였던 벨기에의 아르덴 삼림지역 역시 당시 돌출 전선인 "벌지'였습니다.

그래서 벌지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지평리 전투가 벌지전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전법은 산악능선 기동으로 아군을 우회하여 포위 섬멸하는 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지평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평리의 돌출된 프랑스대대만 섬멸하면 남한강유역에 대한 장악권은 중공군에게 넘어가고 더 중요한 것은 수원과 원주를 잇는 UN군의 전선을 양분할 수 있다는 전술상의 잇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공군은 프랑스1개 대대에 무려 3개사단병력을 투입하여 섬멸하려고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51년 2월 지평리 전투 상황도
이것을 간파한 당시 리지웨이장군은 프랑스 대대 지휘관인 몽클라르중령에게 지평리 사수를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벌지대전투당시 바스토뉴를 사수하라고 당시 101공수 사단장에게 명령하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포위된 상태에서 프랑스 대대는 불굴의 토혼을 발휘하였습니다. 지평리를 둘러싼 고지는 포기하고 대대병력으로 지평리의 평지에 겹겹의 철조망을 구축하고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싸웠습니다. 밤마다 공격하는 중공군에게 맞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백병전을 불사하고 싸웠습니다.

 

   
▲ 중공군 모습
4. 중공군은 그동안 미군과 전투를 할때 꼭 밤에 하였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꽹가리, 북, 피리,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시끄러운 소리는 다 동원하여 UN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산악능선으로 기동하여 아군의 후방과 좌우 측면 동시에 사방 팔방에서 그것도 밤에 따발총소리와 함께 공격하는 중공군을 상상해 본다면 그 섬뜩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전법이 주효하여 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보통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공군의 공격 숫자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고 후세의 전사가들은 말합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입니다. 밤에 온갖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공격하는 중공군을 수비하는 미군이나 유엔군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연대 병력도 사단병력처럼 느껴질수 있는 사항이긴 합니다.

 

   
 
그런데 지평리전투에서의 프랑스 대대는 여느 미군과는 달랐습니다. 만반의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또 밤에 중공군이 꽹과리와 피리등을 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면 프랑스 대대는 싸이렌을 동원하여 응수하였습니다. 아무래도 꽹과리 소리보다는 싸이렌 소리가 더 컸겠지요?

이렇게 3일낮밤을 프랑스대대는 중공군과 싸워 지평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의 주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에 후방의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 듬을 수 있었습니다.

5. 리지웨이 장군은 지평리에서 고립된 프랑스 대대를 구출을 명령합니다. 그래서 미8군 예하 5기병여단에 소속된 크롬베즈 중령에게 그 임무가 부여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성된 특수임무부대(TFT)가 구성되었습니다. 탱크 23대와 보병 150여명(1개중대)로 구성된 크롬베즈 특임대대는 지평리를 향해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림에서 파란 화살표가 크롬베즈 특임대대의 구출진격로입니다)

 

   
▲ 그릇고개
6.크롬베즈 특임대대의 구출진격도 순조롭지느 못했습니다. 구출을 위한 진격과정에서 곳곳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지평리로 가는 길목과 고개마다 중공군은 크롬베즈 특임대대를 공격하였습니다.

특히 곡수리에서의 피해는 막대하였습니다. 같이 동행한 보병중대의 피해가 컸습니다. 또한 시간적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롬베즈 중령은 보병의 엄호를 포기하고 탱크에 소수의 보병을 탑승시키고 탱크로서 중공군의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엿습니다. 그 막바디 고비가 바로 구슬고개 였습니다.

 

   
 
7. 구슬고개의 양쪽 산봉우리에서 공격하는 중공군에게 탱크포로 응사하면서 크롬베즈 특임대대는 마침내 지평리에 다다랄 수 있었습니다.

대전차 장비를 구비하지 않았던 중공군은 크롬베즈중령의 특임부대의 지원공격에 그리고 프랑스대대의 사수의지에 결국 굴복하고 지평리에서 철수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 지평리 전투의 의의는 여러차례 걸쳐서 언급되었지만 또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는 후일 용문산 지구 전투의 승리로 이어지고 이것은 나중에 백마고지 전투로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의미있는 것은 한국전에서의 탱크 단독 운영이라는 경험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전에서 패튼장군이 보여주었던 탱크를 이용한 적 포위망 돌파의 전법이 한국전, 특히 지평리 전투에서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푸른한국닷컴, BLUEKOREADOT

고성혁 sdkoh40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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