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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과 신영복·박성준에 대하여

기사승인 2022.10.20  22: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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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박성준
자생적 조직인 인혁당과 달리 통혁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
 
[김사랑 시민활동가] 신영복이 연루榮 통일혁명단 사건은 1968년 8월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 조직 사건이며 남한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1992년).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사건 (2013년)등과 함께 실체가 있던 대표적인 공안사건이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파도를 거치면서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이 남쪽에 퍼지면서 지하혁명 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한다. 1964년 3월 15일 남한에서 비밀리에 통일혁명당 창당준비 대회가 조직되었고 당시 통혁당 주요 참가자들의 명단은 김종태·김질락·이문규·신영복 등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지하신문 혁명전선과 대중잡지 청맥 (주간잡지 김질락)등을 발간했으며 대학가 에서는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통일혁명당 기관지 혁명전선에 적힌 글의 일부분은 이렇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님 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어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당인 만큼 결속해서 정치활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강고하게 결집 시켜야한다’라고 되어 있다.
 
대검이 펴낸 공안사건 실록을 참조 하자면 학생운동에 대한 직간접 영향,다른혁명 조직과의 결합시도,1967년 국회의원 선거 및 대통령 선거에 대한 반대투쟁, 미국 부통령 험프리 부통령 방한반대,사토 일본 수상 방한 반대투쟁 등에 통혁당 산하의 학생운동 조직이 동원됐다.
 
통혁당 서울시위원회는 자신의 임무 중에 조직을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해 각지에 무기고의 설정과 무기획득및 비축을 위한 방법 등을 설정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통일혁명단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최고의 목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두고있었다.
 
통일혁명당을 뒷받침 해주는 대중잡지 청맥은 반정부 반미노선 논조였으며 보안상의 이유로 사회주의 논평 기사는 개재되지 않았다고한다
 
통일혁명당은 선(先) 진보적 인텔리, 후(後) 기층인사
 
조직화 방식 아래 사회적 영향이 큰 사람부터 포섭해 나갔다. 통일혁명단 책임자인 김질락에 따르면, 서울대를 비롯 고대·연대·중대·숙대 등 주요 대학에 포섭대상자들이 선정되어 있었다. 그 외 일반 민중 부분에 대한 조직화는 서울대 구농회·농진회등 멤버들과 접촉하거나 영등포 지구 하층 청소년의 교양 덕소농민학교운영·화남농장·백운산 농장 등에 실무자로 참여했다.
 
통일혁명당 서울시 위원장 김종태는 1956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청맥전선’이란 비밀써클을 조직하기도 했고 자신의 둘째형 김상도의 국회의원 비서로 정치에 입문을 한 후 4월항쟁 이후 경북노동 연합회 지도고문·교원노조 등에도 개입 했다.
 
이후 김종태는 남파 간첩 김수영과 전남 신안 임자도에 가서 노동당 대남사업 총국으로부터 청맥지를 창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이것이 통혁당 서울시 위원회의 시초가된다.
 
통혁당을 만든 김종태는 4차례 북한을 왕례하고 김일성을 면담하고 미화 7만달러 한화 3천만원. 일화 50만엔의 공작금을 받고 북한 지령을 167회 수신했다. 김질락은 김종태의 친조카였고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후 매일신문사의 논설위원을 지내다가 김종태의 제안으로 청맥을 만들면서 통혁당의 활동을 했다.
 
김질락이 같은 학교 신영복을 포섭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신영복은 한명숙 남편 박성준과 함께 통혁당 학생운동조직을 만들고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문규는 대구지역 부호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이념써클 신진회의 핵심멤버였는데 주간지 청맥을 통해 통혁당 활동을 하게 榮
 
이후 통혁당 총책인 김종태가 검거된 후 이문규 또한 검거가 되고 이문규의 집에서 북의 지령을 받는 암호 문건이 발견이 된다. 암호문건을 해독한 당국은 1968년 8월20 군.경.정 합동작전을 통해 북한군 12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고 공작선을 납포 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후 김종태 등 주범 3명을 포함한 통혁당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고 북한에 가서 노동당에 입당한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당하며 당시 무기징역을 받은 신영복은 전향서를 쓴 뒤 1988년에 가석방이 되고 신영복의 학교 후배인 한명숙의 배우자 박성준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022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는다.
 
박정희 정부 시절 인민혁명당 사건(1964)·동백림사건(1967)·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 (1974)·민청학련사건(1974) 등이 있지만 청맥 편집장이였던 이문규는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며 1967년 북한 노동당에 가입도 했다. 통혁당 신영복의 하부선으로는 학교 후배인 박성준이 있으며 박성준은 자신의 처 한명숙·박경호.김국주 등을 포섭한 혐의로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북한은 통혁당 주범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한뒤 대규모 추모집회를 열었다. 이후 평양기관차공장은 김종태 전기기관차 연합기업소로, 해주사범 대학은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바뀌었다. 이후 통혁당은 1979년 강원도 재건위가 발각된 것을 끝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측 주장에따르면 1969년 당 중앙위회가 지하에 조직되었고 1970년 통일혁명당 소리라는 방송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통혁당은 1985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바뀌고 명칭도 구국의 소리로 바뀌었다가 2003년 중단, 2005년엔 반제민족민주전선 으로 바뀌어 잔존 했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을 “미제와 남조선 당국이 통혁당 성원들을 체포하여 극형을 선고한 사건이라고 비분강개하며 북한 교과서에는 통혁당은 조선 노동당의 붉은 혈통을 이어받아 남조선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전위부대 였다”라고 평가했다.
 
통혁당의 공작 지령중 일부에 “1967년 5월 대통령 선거는 제1야당 후보를 지원하라. 국회의원 선거는 극렬 야당인사를 지원하라.출판사를 경영하되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반미 반정부사상을 고취하라” 는 내용도 있다.
 
1998년 신영복은 월간 말지 인터뷰에서 통혁당 관련 자신은 전향서를 쓰긴 했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반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으며 통혁당 가담한 것은 양심의 명령 이였고 향후에도 통혁당 가담한때와 비슷한 생각으로 살겠다고 했다. 신영복의 통혁당 개입 관계에 대해 사건 가담자 김질락은 신영복이 깊이 관여됐다고 옥중수기인 어느 지식인의 죽음에서 폭로하기도 했다.
 
신영복은 일반인들에겐 서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소설가 조정래는 그의 소설 한강 표지에 신영복의 친필을 담았으며 소주 ‘처음처럼’ 포장지와 교보문고 신용호 회장의 어록인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 더불어 민주당 전 대표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는 슬로건 외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문구에도 신영복 서체가 쓰인다.
 
노회찬 재단 노무현 재단 성공회대 등에도 그의 서체가 쓰이며 신영복이 대중에 공개한 마지막 필체는 세월호 학생을 추모하기 위해 2014년 10월 쓴 아이들을 구하라 였다.
 
민주당 계열에서는 문재인·안희정을 비롯 정청래·손혜원·심상정·노회찬 등과의 친분이 깊고 선거 나갈 때 그의 조언을 구하거나 존경하는 민주당 인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보수정당쪽은 통혁당 사건에 연류되었다는 사건 때문에 그의 사상을 종북주의자로 본다. 1990년 범민련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민경우는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 공안기관의 고문이 문제지 발표한 내용의 대부분은 진실로 본다고 말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생적 조직인 인혁당과 달리 통혁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였다고 폭로했다.

푸른한국닷컴, BLUEKOREADOT

김사랑 tong0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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