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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맹 활동과 이재명의 측근으로 활동하는 동안 정진상의 자신의 이력뿐 아니라 얼굴까지도 공개를 꺼리거나 철저히 숨겨 왔다. 그러나 실체를 드러낸 정진상의 일성은 그의 현재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
[길도형 장수하늘소 대표] 정진상은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면서 기자들에게 "군사 독재 정권보다 더한 검찰 독재"라고 일성을 터뜨렸다. 순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졌다. 뭐야? 저런 놈을 이재명이 끼고 있었다고? 저렇게 대가리가 80, 90년대에 멈추어 버린 화석이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과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다수 야당 대표의 최측근이자 장자방 노릇을 해왔다고? 그뿐인가? 정진상이 주워섬기는 워딩 자체가 이재명을 대신해서 보고받고 결제한 최측근 장자방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수준 이하였다.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하는 정진상. 사노맹 활동과 이재명의 측근으로 활동하는 동안 정진상의 자신의 이력뿐 아니라 얼굴까지도 공개를 꺼리거나 철저히 숨겨 왔다. 그러나 실체를 드러낸 정진상의 일성은 그의 현재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뭘까? 정진상에게 무슨 인사이트가 있어서 이재명이 끼고 있었던 걸까? 김용이 구속될 때도 겉으로나마 평정성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였던 이재명은 정진상 구속이 확실시되는 순간, 뜬금없이 유시민 앞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이재명을 여기까지 추동(종북 주사파 그룹이 즐겨쓰는 말)해온 세력이 어디인지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1968년생 정진상은 부산 경성대 87학번 또는 88학번이다. 정진상은 학부 재학 중 사노맹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사노맹 지도부는 이정로(실명 백태웅, 서울대 법대 81학번), 박노해(실명 박기평, 시인), 은수미, 박창호, 김진주(이화여대 83학번, 박노해 부인) 등 서울대 중심의 80년대 초중반 학번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노동계의 급진 관념 좌파들이 결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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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핵심 인물들. 급진 관념 좌파 성향의 이들은 마르크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재벌 재산 몰수' '토지 무상 분배' '민중위원회 설치'를 통한 폭력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노해, 이정로, 은수미 |
문재인 정권 민정수석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조국도 사노맹의 주요 인물로서 대학 재학 시절에도 그렇지만 대중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노맹 조직원 활동 중에도 서울대 동기인 백태웅 등과 직접 지도부 활동을 하지 않고 학술단체 타이틀을 내건 지하조직에서 이론적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노맹은 자기 조직의 근거지이자 세 확장의 주 타깃을 대학으로 설정했다. 사노맹 등장 초기 그들의 혁명 이론의 기본은 철저히 마르크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그 세계관은 국제주의를 표방했고 그런 만큼 민족적 종족적 관념을 토대로 하는 단일 국가체제를 부정하며, 소비에트 중심의 국제주의가 그들의 목표였더. 그런 한편으로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까지 수용하는 입장을 보이는 등 자신들의 주장과 달리 이론적으로 통일되거나 완성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주로 서울 구로-가리봉 공단과 안양, 부천, 부평 등 노조활동이 왕성한 공업단지 중심으로 투신하여 대중주의를 대중추수주의로 배격하는 대신 전술적으로 선도투쟁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은 노동 대중을 포섭하고 교화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파업 현장이나 집회 현장에 소수의 과격분자가 난입해서 '재벌 재산 몰수' '토지 무상 분배' '민중위원회 설치' 등의 슬로건을 외치고 찌라시를 뿌린 뒤 혼란에 빠진 집회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사노맹의 목표는 그렇게 특공조가 총파업을 유도하고 결정적 시기에 일제히 봉기,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자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전술적 목표는 대학가를 해방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진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의 소수의 그 특공조가 자기가 재학 중인 대학이나 지역 대학가에 직접 들어가 대학가 집회뿐 아니라 강의중의 강의실, 모임 중의 서클 문을 열어젖히며 난입, '재벌 재산 몰수' '토지 무상 분배' '민중위원회 설치'의 당위가 적힌 찌라시를 뿌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앙칼질 목소리로 '아지'(agitation, 선동)를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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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필로 작성된 사노명 결의서. 섣부른 문장 구구절절 어설픈 혁명가의 치기가 자부심으로 차고 넘친다. 백태웅과 박기평, 조국, 은수미는 사노맹의 결의 대신 권력과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지만 정진상은 젊은 시절 단순 무식의 활동력과 신념이 머리 속에 화석처럼 굳어져 있음을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며 기자들 앞에서 한 결기 가득한 발언이 입증한다. |
자기들 나름 단단한 이론과 과학적 선도적 실천력을 겸비한 소수정예의 특공조 의식으로 무장한 사노맹 조직원들은 그런 만큼 운동권 내에서 자신들은 우월 또는 선민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다른 노선이나 분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관념주의자들이자 무모한 모험주의자들로서 전체 운동권을 말아먹는 불순 과격한 분파주의자들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소위 말해 그런 '또라이'들 중에서도 "허접" 상또라이가 사노맹의 언더에서 이론가를 자처한 조국이었다.
『노동의 새벽』으로 운동권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사노맹의 상징이었던 박노해가 1991년 수배 도바리 중 체포되어 1심에서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고, 1992년 이정로란 가명을 쓰며 활동한 백태웅이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최종 15년형을 선고받는다. 그 밖에도 박노해의 부인 김진주, 은수미 등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어 재판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사노맹은 사실상 일망타진되며 와해되기에 이른다.
사노맹은 1991년 박노해가 체포되고 1992년 리더인 이정로 등 핵심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하부 조직원들까지 거의 대부분 체포되며 와해 상태에 이른다. 특히 운전 중의 박노해를 안기부 요원이 체포할 당시 박노해는 행인들에게 '언론에 자신의 체포를 알려달라' 소리쳤고, 1심 재판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영광입니다"라는 말로 허세를 부렸다. 박노해가 노동자로서 현장 노동자들의 시편과 일기 등을 가필하고 자신의 시와 묶어 펴낸 『노동의 새벽』은 당시 1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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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맹은 1991년 박노해가 체포되고 1992년 리더인 이정로 등 핵심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하부 조직원들까지 거의 대부분 체포되며 와해 상태에 이른다. 특히 운전 중의 박노해를 안기부 요원이 체포할 당시 박노해는 행인들에게 '언론에 자신의 체포를 알려달라' 소리쳤고, 1심 재판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영광입니다"라는 말로 허세를 부렸다. 박노해가 노동자로서 현장 노동자들의 시편과 일기 등을 가필하고 자신의 시와 묶어 펴낸 『노동의 새벽』은 당시 1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그 부류들 중에 정진상이 있었다. 부산 브니엘고를 졸업한 정진상은 87년 부산 경성대 행정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입학과 함께 학생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정진상은 3학년 무렵인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출범에 함께하며 사노맹 활동에 본격 참여한다. 하반기에 구성된 새 학기 총학생회의 노동분과위원장을 맡았으며, 1990년경 사노맹 지도부는 학생위원회 위원장으로 경성대 노동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정진상을 임명했다.
당시 부산 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이 부산대였던 만큼 경성대 출신 정진상을 학생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즉 정진상의 사노맹 인연은 간접적인 게 아니라 조직의 핵심 인물로서 이정로(백태웅)와 박노해(박기평), 은수미, 조국 등과 동지적 관계로 엮여 있었던 것이다.
출범과 함께 안기부 등에 의해 수배, 체포령이 떨어진 사노맹은 지도부뿐 아니라 학생 조직원들까지 대부분이 수배된 상태로 그들의 활동 자체가 비합법 비밀 활동일 수밖에 없었다. 학생위원장을 맡은 정진상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령이 떨어졌다. 90년대 초 박노해와 이정로가 차례로 체포되어 중형의 실형을 선고받는 가운데 정진상 또한 1991년경 체포되지만, 안기부와 검찰이 아니라 군 헌병대로 넘겨져 수사를 받고 군검찰에서 보완 수사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제2군단 보통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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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은수미.이재명,김홍걸,조국. 사진@비전성남 |
이 시기를 두고 92~94,95년 사이 군복무를 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당시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노맹 관련 인원의 재판, 그것도 군사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또한 정진상이 군사재판을 받았다는 것은 민간인 신분이 아닌 현역 복무 중이었거나 징집영장이 나온 상태에서 도바리 중 군 수사기관에 체포되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자 남한산성 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을 가능성 또한 짚어 봐야 한다.
사노맹 조직원 정진상은 1996년 '이재명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며 장차 이재명과 조국, 이재명과 은수미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푸른한국닷컴, BLUEKOREADOT
길도형 hanuls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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