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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 8. 제1기(1592. 4 - 1592. 6) 초기 일본군의 공세③

기사승인 2019.09.05  18: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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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평양성 전투
 
박희봉 교수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6월 8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제1번대 18,700명과 제3번대 병력 중에서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던 5,000명이 평안남도 중화를 거쳐 대동강변에 도착했다. 일본군 제3번대 병력 중에서 오오토모 요시무네의 병력 6,000명은 황해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지역사정에 밝지 못한 일본군은 대동강 남쪽 강변 10여 곳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6월 11일에 국왕이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하면서 윤두수, 유성룡, 김명원, 이원익, 송언신 감사, 이윤덕 병사 등에게 머물러 평양을 지키라 명했다. 대동강 사수를 위해 평안도에 있는 고을 수령들이 군대를 보내왔다. 자산군수 윤유후가 성중 군사와 장정들을 다 동원하니 3, 4천 명이었다. 또한 600여 명의 승려들도 조선군에 합류했다.

대동강 북쪽에서 대치하고 있던 조선군은 신무기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빠른 선박에 활 잘 쏘는 군사들과 현자총통, 신기전을 싣고 강 한복판까지 배를 저어 가서 일본군 진지에 화포사격을 가했다. 현자총통의 화포와 신기전의 대형 화살이 강 건너 일본군 진지에 날아가 일본군을 당황하게 하였다.

사기가 오른 조선군은 6월 13일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수백명을 죽이고 군마를 탈취하였다. 6월 14일 도원수 김명원은 영원군수 고언백, 벽단첨사 유경령으로 하여금 정예병사 400명을 이끌고 배를 타고 건너가 적을 다시 야습하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진영을 급습하여 어느 정도 전과를 거두었으나,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다급해진 조선군은 수심이 얕은 왕성탄을 건너 퇴각했다. 14일 저녁 일본군은 왕성탄을 건너 총공격을 감행했다. 조방장 박성명, 수탄장 오응정 등이 막았으나 중과부족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좌의정 윤두수가 급히 평양성에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무기를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6월 15일 일본군은 평양성에 아무 저항 없이 입성했다.

 
평양성 전투.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6월 중순 일본군 주요 거점지역
· 평안도: 평양, 황주, 중화
· 함경도: 철령, 덕원, 문천, 영흥, 홍원, 성진 해정청, 경성, 회령, 길주, 명천
· 황해도: 금천, 평산, 안성 (조선: 연안성, 해주)
· 경기도: 한양, 용인, 수원, 개성, 여주, 양주, 파주
· 강원도: 금화, 금성, 회양, 삼척, 묵호,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원주
· 충청도: 영동, 충주, 청주, 죽산
· 경상도: 부산, 동래, 양산, 밀양, 청도, 언양, 김해, 성주, 무계, 지례, 등산, 경주, 선산,상주, 대구, 인동, 문경, 장기, 영일, 안동, 풍기, 경주, 영천, 신녕, 의홍, 군위, 비안, 용궁
 
1592년 6월 평양성점령 시기 일본군의 최대 세력.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해전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의 무능과 판단착오에 의해 경상도 수군의 자멸과 달리,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1개월 후부터는 전라도 수군의 맹활약이 시작된다. 당시 전라도 수군은 여수를 본거지로 한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에 거북선 2척,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등 총 41척에 군사 약 7,000명, 해남에 지휘부를 둔 이억기 휘하의 전라우수영에 판옥선 25척, 협선 16척 등 총 41척에 군사 6,800명이다.

즉 전라도 수영은 거북선 2척, 판옥선 49척, 협선 31척, 병사 약 13,800명이다. 또한 충청도 수영에 판옥선 40척이 있었다. 실제 전투에서는 충청도 함선이 판옥선 1척 등 10척이 참가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대부분의 해전은 전라도 수군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라도 수군은 임진왜란 초에는 지역방어를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상도로 원정을 자재하였으나, 한양성이 함락된 5월부터는 적극적으로 일본군이 있는 경상도 바다로 진출하였다. 이순신과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도 함대가 경상도로 진출한 첫 날은 한양성이 함락된 다음 날인 5월 4일이다.

1차 해전은 5월 7일 거제도 옥포에서 벌어졌다. 옥포해전은 원균의 경상우수영에서 판옥선 4척, 협선 2척, 병력 620명을 동원하였고,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을 중심으로 한 전체 병력은 판옥선 27척, 협선 17척, 병력 3,700명이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처음으로 격돌한 해전에서 승부는 일찌감치 결정되었다. 일본군은 각종 전투에서 항상 승리하였다는 자만감으로 조선 병선에 달려들었으나, 27척의 판옥선에 10문씩 장착된 화포가 불을 뿜으면서 일본 병선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파손되었다.

이것을 본 조선군의 사기가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느리지만 튼튼한 조선의 판옥선이 빠르기는 하지만 구조가 약한 일본 병선에 돌진하여 부딪쳐 파괴하고, 허둥대는 일본군을 조선의 사수들이 쏘아 죽였다. 2시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의 대선 16척, 중선 8척, 소선 2척 등 합계 26척을 격파했다. 일본군 전선의 정원이 대선 200명, 중선 100명, 소선 40여명인 것으로 미루어 4,000여명의 일본군이 사망한 것이다.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전함 손실도 없었고,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오직 1명의 부상자만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한 최초의 승리이고, 조선군의 장점을 발휘한 완벽한 전술의 승리였다.

당일 조선 수군은 합포해전에서도 또 다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거제도 북방 영등포까지 진출하여 숙영을 준비하고 있던 오후 4시 경 적선 5척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조선 해군이 추격하자 적선들은 필사적으로 도주하다가 웅천 땅 합포에서 일본군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조선 수군은 포구 안으로 들어가 대포를 발사하여 대선 4척, 소선 1척 등 모두 5척을 불태워 수장시켰다.
 
이순신장군의 1차 출정.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다음 날인 5월 8일 적진포해전이 있었다. 이날 아침, 조선 수군은 척후장으로부터 정찰 보고를 받았다. 적군 13척이 적진포에서 선창에 정박한 채 육지에 올라가 분탕질하고 있는 것을 조선 수군이 공격하여 대선 9척, 중선 2척 등 모두 11척을 격파하였다. 적선 2척만이 필사적으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조선 해군은 1차 출정, 3회의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1차 출정에서 거둔 전과는 일본군 전선 42척 격파에, 일본군 약 6,000명의 수장이다. 조선 수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일본군에게도 약점이 있음을 알게 된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러한 조선 수군의 압도적인 승리는 피난 조정에게도 힘을 불어 넣어주었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고을 수령과 선비들로 하여금 군사를 모집하고 의병을 소집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순신장군 역시 정3품에서 종2품 가선대부로의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순신장군의 2차 출정.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조선 수군의 2차 출동은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사천해전, 당포해전, 진해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등 5차례의 해전을 겪는다. 이순신은 5월 29일 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가 오면 뒤따라오도록 하고 거북선을 포함한 판옥선 23척과 협선 15척을 거느리고 노량을 향해 항진하였다. 노량으로 향하던 도중 경상우수영 함대 소속 판옥선 3척과 하동에서 합류하였다.

5월 29일 조선 수군은 사천해전을 치른다. 노량을 지나 사천으로 향할 때 만난 일본군 전선 1척은 일격에 침몰시켰다. 곧이어 사천만 입구에서 일본군 전선 12척을 만났다. 일본군 저항이 의외로 강해 전투가 격렬했고, 이순신도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 전선 13척을 모두 불태워 격침시켰다. 사천해전 이후에는 일본군 전함이 조선 수군을 함대를 보면 도망가기 바빴다.

6월 2일 조선 수군은 당포해전에서 승리하였다. 하루 전인 6월 1일 밤, 적선 20여 척이 당포에 있다는 척후 보고를 받은 후, 2일 아침 전 함대가 출동하여 10시 경 당포에 도착했다. 일본군 대선 9척, 중·소선 12척 모두 21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었고, 일본군 300여 명이 성 안과 밖에서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을 보자 일본21군은 선상에서 조총을 쏘며 대항했다.

조선 수군은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돌격하여 적선 21척을 모두 침몰시켰고, 흩어지는 적군에게는 활을 쏘아 쓰러뜨렸다. 잠시 후 척후선으로부터 적선 20여 척이 당포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넓은 바다로 나와 적선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던 적선들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6월 4일 적을 찾다가 전라우수영의 이억기 함대를 만나 합류했다. 전라우수영 함대는 판옥선 25척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함대는 전라좌수영 23척, 전라우수영 25척, 경상우수영 3척으로 판옥선만 모두 51척의 연합함대가 되었다.

6월 5일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진해해전을 치렀다. 조선백성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와 당포에서 달아난 적선들이 거제도를 지나 당항포에 있다고 알려 왔다. 전군을 전진시켜 진해 앞바다에 이르니 육지에 함안군수 유승인의 조선기병 1,100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조선기병이 분탕질하고 있던 800명의 일본군 수병을 공격하니, 일본군이 진해에 정박해 두었던 대선 4척, 소선 2척에 나누어 타고 바다로 나왔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일거에 격멸했다.

같은 날, 조선 수군은 당항포해전에서도 승리했다. 척후선을 따라 거북선을 앞세워 적선이 있는 당항포 안으로 쳐들어갔다. 포구에 일본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 등 26척의 적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연합함대가 포구를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공격을 시작하자 적선도 대항해왔다.

조선함대가 진용을 운용하기에 좁기에, 이순신은 명령을 내려 전함들을 뒤로 물리면서 두 편으로 갈라 포위망을 열어주자, 적선들이 빠른 속력으로 탈출하기 위해 일제히 포구에서 나왔다. 그 순간에 이순신이 다시 명령을 내려 적선을 바다 한 가운데서 포위하였다. 460문의 대포를 쏘고, 거북선을 앞세워 돌격하여 적선 1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침몰시켰다. 다음 날 새벽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던 적선 1척 마저 포격으로 부셨다. 결국 발견된 일본군 선박 26척을 모두 침몰시키고, 선박을 운용하던 일본군 2,700명도 대부분 처치한 것이다.

6월 7일 조선 연합함대는 율포해전을 치렀다. 연합함대가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사방을 살피던 척후선이 일본군 대선 5척, 중선 1척을 발견했다. 조선 함대가 전속력으로 쫓자 적선들은 노략질한 물건들을 바다에 버리면서 도주했으나, 조선함대는 적군 대선 3척을 통째로 나포하고, 대선 1척과 중선 1척을 격파했다.

이후 조선함대는 거제도 북단 송진포에서 숙영했다. 8일 부근 일대를 수색했고, 9일 가덕도까지 수색했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해 10일 각자의 수영으로 개선했다. 조선 해군은 2차 출정에서 5차례의 승리를 통해 일본군 선박 72척을 격파하고, 적군 1만여 명의 손실을 안겨주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선군은 선박의 손실 없이 전사 11명, 부상 47명이었다.

조선수군은 5월과 6월에 있었던 두 번에 걸친 출정에서 일본군 전선 104척을 격파하고, 일본군 약 16,000명을 수장시켰다. 조선군은 선박 1척도 잃지 않은 채, 전사 11명과 부상 47명만의 피해를 입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로써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예비대를 바닷길을 통해 평양 이북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병참보급에 문제가 생겨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조선백성의 자발적 군대 조직

 
조선 남부의 의병 거병 지역(1593년 5-6월중).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성에 도착하여 부산성과 동래성을 점령한 후, 양산, 밀양, 언양, 김해, 경주, 창원, 영천 등의 경상도 남부로 진출하고 있을 무렵 현풍의 곽재우가 4월 21일 처음으로 거병하였다. 다른 의병 대장과 마찬가지로 곽재우도 우선 자신의 재산을 내어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고, 60여 명의 친지와 사노비를 무장시켜서 모범을 보인 후, 지역주민에게 호소하여 민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마련하였다. 곽재우의 병력은 심대승 등의 장사 50여 명이 모였고, 지역주민의 합류로 인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급기야 인근 고을 수령의 관군까지 합세하여 4,000명까지 불어났다.

곽재우의 거병에 이어 5월 8일 합천에서 정인홍 역시 거병하였다. 초계의 이대기, 이대표, 이철제, 전치원, 이정 등이 병사를 모집하여 정인홍에 합류하였고, 합천의 손인갑, 고령의 김응성뿐만 아니라 인근의 성주 지역의 관군과 의병도 정인홍군에 합류하였다. 정인홍 군대는 3,000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령의 전공조좌랑 김면 역시 자신의 친인척과 지역주민 700명을 모집하여 거병하였다.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을 참모로 삼고, 박성을 시켜 군량을 모으게 했다. 곳곳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으니 4, 5일 만에 고령과 거창 등지에서 2,000명이 모였다. 김면은 곽준과 박정번을 참모장에, 박성을 군량담당 수속관에 임명하는 등 군대를 조직화하여 전투준비를 하였다. 김면군은 최대 5,0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단성에서 권세춘이 500명을 모아 거병했고, 진주에서는 허국주가 700명을 모았으며, 함안군수 유승인도 피난했던 산에서 내려와 1,100기의 기병을 모아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충청도에서도 5월 초 내금위 선전관을 지낸 무관 조웅이 충주지역에서 거병하였다. 충주지역에서 500여 명이 모였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하여 흩어진 군대가 합류하여 군대 규모가 5,000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5월 21일 전보은현감 문신 조헌이 옥천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했다. 충청도 인근지역인 공주, 온양, 정산, 홍주, 회덕, 보은 등 10개 읍에서 1,000명 의병 모집했다. 같은 시기 공주 출신 승려 영규가 승병 500명을 일으켰다.

전라도에서는 5월 6일 전수원부사 김천일이 나주에서 송제민, 양산숙, 박환 등과 함께 의병 1,000명을 모았다. 충청도에 이르렀을 때, 군사가 수천 명이 되었다. 또한 수원에서 인천으로 향하면서 전라도 지역에 구원병을 청하니 이광이 조방장 이유의와 진도 군수 선거이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6월에는 전동래부사 고경명이 고향인 광주와 장흥 등 전라도 20여개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6월 11일을 군사 일으킬 기일로 정하였더니 선비와 백성들이 많이 응모하여서 군사 6천여 명을 얻었고, 또 각도에 격문을 돌리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말을 수집하였다. 고경명을 대장으로 하고, 학유 유팽로와 학관 양대박을 종사로 하며, 이대윤, 최장중, 양사형, 유학 양회적 등을 군량 조달책으로 삼았고, 그 외에 오자, 김인혼, 오유 등은 고경명의 부장을 삼았다.

이상과 같이 조선백성은 임진왜란 소식을 듣고는 바로 고을마다 지역의 수령 및 사림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했다.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군대의 조직화가 다른 지역보다 빠른 것은 이들 지역이 전쟁발발 소식을 다른 지역보다 먼저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군과의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대규모 군대조직을 자발적으로 결성하였고, 소규모 전투단위는 무관출신들이 맡아 전투를 지휘하였다. 특히 1592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된 후 국왕이 전국적으로 거병할 것을 호소하자 이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산시켰고, 일본군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경상도 지역 전투
 
경상도 지역 전투(1593년 5-6월).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가장 먼저 거병한 곽재우는 가장 먼저 전투를 치렀다. 정암진전투로 불리는 최초의 지역단위 전투는 곽재우의 지휘로 5월 24일 6월 경상도 의령에서 벌어졌다. 일본군은 전라도지역을 담당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휘하 부대 2,000명으로 알려져 있고, 일본군을 공격한 곽재우 군대의 수는 정확하지 않다. 곽재우 군대는 100명에서 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본군 2,000명은 5월 24일 정암진에 도착하여 지역주민을 동원하여 강을 건널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해 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하였다. 이날 밤 곽재우는 나무 푯말을 늪지대에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일본군 선봉대가 도하를 위해 늪지대로 들어가자 곽재우군은 이를 공격하여 전멸시켰고, 일본 주력군 역시 뗏목을 타고 남강을 도하하려 했으나 곽재우군의 매목에 걸려 크게 패퇴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전라도 점령을 위한 첫 진군이 실패한 것이다. 또한 곽재우군은 삼가, 합천지역을 수복하였다.

6월 6일 벌어진 무계전투는 정인홍은 손인갑이 이끄는 조선군과 경상도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제7번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일본군 간에 벌어졌다. 무계는 현재 경북 고령군 성산면에 위치한 곳으로 부산에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상주까지 이어지는 보급로의 중심부이다. 선봉을 맡은 손인갑이 결사대 50명을 이끌고 일본군 진영에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 진영 내에서 조선군은 일본군 30명을 죽였고, 결사대가 일본군 진영에 불을 지르고 나왔다. 이들 결사대를 추격하기 위해 진영 밖으로 일본군이 나오자 보루 밖의 조선군이 또다시 일본군을 공격하여 10여 명을 재차 죽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진영을 정돈하자 손인갑은 군사를 거두고 철수하였다.

무계전투에 이어 손인갑은 바로 마진전투를 벌였다. 낙동강과 황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에 있는 마진나루터에서 일본군 수송선단을 기습한 것이다. 손인갑은 군대를 2개 진으로 나누어 적 수송선단이 1진 앞을 지나면 활을 쏘아 일본군 선박을 공격하고, 2진 앞에 다다르면 조선군 2진이 일본 선단을 공격하고, 1진은 다음 공격 준비를 하는 방식으로 일본군 선박을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장수 1명을 쏘아 죽인 것을 포함하여 일본군 수송선 한 척을 전복시켰고, 손인갑은 칼을 빼들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은 보급을 위해 낙동강 동쪽 현풍, 창녕, 영산성 등에 나누어 주둔하면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보급하는 수송선단 경비임무를 맡고 있었다. 낙동강변에 있는 현풍, 거창, 합천, 고령 등에서 군사를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군대는 낙동강 수로를 중심으로 매복 및 유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의 낙동강 보급로를 끊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선 8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전체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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