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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 6. 제1기(1592. 4 - 1592. 6) 초기 일본군의 공세①

기사승인 2019.08.26  15: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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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점령 전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점령 전략
 
박희봉 교수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전령전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군 주력부대로 수도인 한양성을 함락시키고 국왕으로부터 항복을 받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이 한양성을 점령하게 되면 조선과의 전투는 끝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한 영주가 다른 영주의 핵심 지역을 점령하면 패배한 영주와 핵심 추종자는 자결하고, 하급 무사와 주민은 새로운 영주에게 충성을 맹약함으로써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면, 조선국왕이 자결 또는 항복할 것이고, 조선군을 포함한 조선백성 모두가 일본군의 명령에 복종할 것으로 착각하였을 것이다.

일본군이 조선군 병력이 남아 있지 않은 한양성 공략에 5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 이 까닭이다. 그러나 조선국왕은 한양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종묘사직과 조선을 지키려고 하였고, 조선백성 모두는 일본군에 결사 항전하였다.

둘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양성을 함락한 이후에 일본군 병력 8개 부대에게 조선 8도를 나누어 점령하고, 병력과 병량을 모아 평양성 이북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한양성 점령 이후까지 조선군 및 백성이 끝까지 항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조선백성도 일본인과 같이 점령군에게 순순히 복종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즉, 한양성을 함락한 이후 조선백성이 일본군에게 복종한다면 조선백성 중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조선땅에서 명나라를 침입하는데 필요한 병량을 조달하겠다는 의도이다.

셋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번대부터 9번대까지의 15만 8,000명으로 조선 8도를 점령하고 조선 땅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병량을 확보한 후에는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10번대 이하의 병력을 선박을 이용하여 남해와 서해를 돌아 평양 이북으로 파견하여 명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차질이 발생하게 된다. 조선땅에서 병력과 병량을 모집한다는 계획도 무지의 산물이었고, 조선의 남해와 서해를 이용하여 병력을 파견한다는 계획은 이순신장군의 조선해군력을 간과한 것이다.

넷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점령 이후 인도까지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나라를 점령한 후, 일본 천황과 그의 양아들인 간파쿠(關白)는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명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자신은 영파(중국 상하이 인근)에서 인도를 공격할 준비를 하겠다고 공언한 데서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조선을 비롯한 외국에 대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명나라와 인도 침공계획은 실행을 해보지도 못했다.
 
조선 수군의 대응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번대가 부산 영도에 도착했다. 다수의 한국 역사책에서 이때 일본군 병력수를 1만 8,700명, 병선을 700척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 병력수는 1만 8,700명이 맞다. 그러나 병선 700척은 과장되었다. 병선 700척은 당시 일본 수군의 총 병선수이다. 일본 병선 1척에 육군 200명 정도가 탔을 것으로 추정하면 약 100척 정도의 병선을 타고 제1번대가 침략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당시 박홍이 지휘하던 경상좌수영과 원균의 경상우수영에는 각각 판옥선 44척, 협선 29척 등 73척의 전함이 있었고, 경상좌·우수영을 합한 경상도 수군은 판옥선 88척, 협선 58척, 군사 약 24,000명이 있었다. 경상도 수군은 수적으로도 고니시가 이끈 일본군 제1번대를 충분히 대적할만 했다. 병선의 질적 수준을 보아도 조선 수군의 주력 병선인 판옥선은 화포가 10문씩 장착되어 있었던 반면, 일본 수군은 화포가 없었다.

만일 박홍과 원균의 경상도 병선이 출동하여 일본군과 해전을 벌였다면 임진왜란은 전혀 다른 양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홍의 경상좌수영의 함선은 임진왜란 전 과정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부산에 있던 경상좌수영의 병선과 병기를 적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체 병선을 수장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원균도 수군 1만 명을 해산시킨 후,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 만호 우치적과 함께 남해현에 머물면서 육지로 몸을 피했고, 통영에 있던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만을 남긴 채, 침수시켰다. 경상도 수군은 전투 한 번 치러보지도 못하고 극소수의 함선만을 남긴 채 스스로 괴멸되었다.
 
부산진성전투
 
조선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의 첫 번째 전투는 1592년 4월 14일 새벽 부산성에서 벌어졌다. 부산성을 수비하던 조선병력은 정발장군의 휘하에 군민 2,000명 또는 3,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산성전투에서 조선 상비군의 병력수는 800명 또는 6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 1번대는 부산 앞바다의 영도(당시명 絶影島)에 4월 13일 도착하여 1박을 하고, 4월 14일 새벽 부산성에 나타났다. 배 멀미에 지친 일본군을 쉬게 하고, 전투에 앞서 부산성에 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하려는 일본군 장수의 치밀함을 알 수 있다. 부산성을 공격한 일본은 18,700의 정예군이고, 화력과 개인 병기 모두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정면에서 부산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정면에서 조총을 쏘아 우월한 화력을 시위하여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실질적으로는 성벽이 낮은 배후로 병력을 파견하여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일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투결과를 극대화시키는 당시 일본군 특유의 전법을 구사한 것이다.

따라서 부산성전투의 결과는 너무도 당연했다. 오전 5시에서 7시까지의 1차 전투는 조선군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신흥무기인 조총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하였다. 오전 10시에서 12시까지 실질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2시간 동안 정발장군이 지휘한 조선군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따라와 임진왜란을 목격한 포르투갈인 루이스 프로이스(2008)에 따르면 조선군은 전력을 다해 싸우다 거의 모두 전사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래성전투
 
동래성전투는 부산성전투 다음 날인 4월 15일에 벌어졌다. 동래성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의 정확한 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군민 3,500명이라는 것이 유력하다. 동래성전투에 참여한 조선군은 부산성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 양산군수 조영규 등이 지원하러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일본군의 침략 사실을 인지하였고,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침략에 대해 조금이나마 준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일차로 병력을 다소 보충하였을 것으로 판단됨에 따라 조선군은 1,000명 정도이고, 민간인도 2,500명 정도 전투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조총의 위력을 보고받고 통나무 방어책을 만들어 대비하였다.

동래성을 공격한 일본군부대는 부산성을 함락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 1만 8,700명이다. 일본군 역시 부산성전투에서 다소 희생이 있었겠지만 병력수가 크게 줄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산성에서 동래성까지 약 20km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성을 함락한 일본군이 바로 다음 날 동래성을 공격했다는 것이 놀랍다.

부산성을 함락한 후 정리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1만 8,000이 넘는 대병력이 이동하는 데만 5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 날 동래성을 공격했다는 것은 일본군의 전투준비가 얼마나 치밀하였을 것인지를 말해준다. 특히 일본군이 부산성전투에서 조선군의 화살 공격에 의해 희생자가 발생함에 따라 일본군 장수복을 입힌 허수아비를 준비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군 전투준비의 치밀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도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을 정면에서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군의 전투력 손실을 최소화하고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겠다면 길을 비켜라 (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다. 동래성 수비를 지휘하던 송상현부사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 (戰死易 假道難)”고 회답했다.

전투는 시작되었고, 조선군이 준비한 통나무 방어책으로 조총을 막을 수 없음에 따라 조선군의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백성들의 합세로 일본군의 공격을 정면에서는 막아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래성 동문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성안으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이 성안으로 진출한 이상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개인 간의 검술로는 조선군과 백성은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송상헌부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장수와 군사, 백성이 전투가 시작된 2시간 만에 거의 전사하였다.
 
조선 조정의 대응
 
부산성 및 동래성전투가 있은 후, 4월 18일 밀양전투 (양산 목사 박진 휘하의 300명의 군민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 18,700명간의 전투), 4월 19일 언양전투 (소수의 군민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번대 22,800명간의 전투), 4월 20일 김해전투 (김해 부사 서예원의 1,000명의 관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2번대 11,000명간의 전투), 4월 21일 경주전투 (경주 목사 박의장 휘하의 소수 관군과 가토 기요마사의 2번대 22,800명간의 전투) 등에서 병력수의 부족, 무기의 열세, 전투경험의 부족 등 전반적인 전투력의 부족에 의해 조선군은 일본군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전투력의 일방적인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맞아 싸운 조선 수령들의 용기와 애국심이 오히려 놀랍다.

이렇게 일본군이 북진하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기본적으로 두 단계의 방어전략을 마련한다. 하나는 경상도지역 지방수령들과 휘하 병력을 대구로 집결시키고,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한양에서 대구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막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충청도 지역 병력을 충주로 집결시켜서 신립으로 하여금 이 병력을 지휘하여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각 지역의 지형지물을 이용, 주요 고갯길에 장수를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우방어사 조경에게는 추풍령에서 일본군 3번대 구로다 나가마사의 서로 진격을 막게 하였고, 좌방어사 성웅길에게는 일본군 2번대 가토 기요마사가 진격하고 있는 동로를 저지하도록 했다. 또한 조방장 유극량에게는 죽령을 방어하도록 하였고, 조방장 변기에게는 조령을 방어하도록 했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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