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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25.알려진 역사, 알아야 할 역사 ⑤

기사승인 2021.07.27  0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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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6. 임진왜란의 상징으로서 진주성의 가치와 향후 과제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전적지는 매우 많다. 4차례 전투를 치른 평양성, 전쟁 초기 조선의 주력이 무너진 충주 탄금대, 초기 육지전투 승전을 거둔 웅치와 이치, 중과부족의 병력으로 적의 대병력을 공격하다가 결국 모두 전사한 고경명과 조헌, 영규의 금산성, 관군과 백성의 단결로 이끌어 낸 행주산성, 무적함대 조선 수군의 한산도, 의병에 의해 이뤄낸 각종 승전과 실지수복 등 가슴 저린 전적지는 셀 수 없이 많다. 이 전적지들은 모두 많은 역사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진주성은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로 임진왜란 시 각종 전투의 다양한 특징과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진주성전투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전투의 상징성과 향후 과제에 대해 논의하겠다.

첫째, 진주성에서 벌어진 두 차례 전투는 임진왜란에서 가장 병력 동원이 많았다. 특히 조선군과 의병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군이 동원된 전투이다. 4차례로 임진왜란에서 가장 많은 전투가 치러진 평양성전투에서 총동원병력은 조선군 및 명군은 총 7만 3,000명이었고, 일본군은 7만 9,800이었다. 반면, 두 차례 전투가 있었던 진주성전투에서는 조선군 및 의병은 9,600명이 참여하였고, 일본군은 12만 3,000명이 동원되었다. 즉 임진왜란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일본군 병력이 동원된 전투이다. 특히 일본군으로서는 진주성이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둘째, 진주성은 동원된 병력이 가장 많았던 곳이기도 하거니와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현장이기도 하다. 4차례의 평양성전투는 1차전에서 3차전까지 실질적으로 하루 동안 단 1회의 교전이 있었고, 4차 평양성전투는 3일 동안 4회 교전을 벌였다. 행주대첩은 하루 동안 3회의 교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반면, 진주성전투는 1차전 때 4일 동안 10회의 교전을 치렀고, 2차전 때는 8일 동안 25회의 교전을 치렀다.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는 총 12일 동안 35회의 교전을 치른 임진왜란 최대 격전의 장소인 것이다.

셋째, 두 차례 진주성전투는 일본군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제1차 진주성전투, 즉 진주대첩에서는 3,800명의 조선군이 일본군 3만명을 맞아 4일 동안 싸운 끝에 일본군 만여명을 죽였다. 그리고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5,800명의 조선군 및 의병이 일본군 9만 3,000명과 8일간 사투를 벌인 끝에 3만 8,000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이러한 일본군 사망자의 급증으로 인한 일본군은 치명적으로 전투력이 상실되었다.

넷째, 두 차례 진주성전투로 인해 임진왜란의 전투 흐름이 바뀌었다. 진주대첩으로 인해 일본군은 공격에서 수세로,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격으로 공수가 바뀌었다. 또한 제2차 진주성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후퇴의 명분을 찾아 퇴각하였다.

진주대첩 결과로 인해 일본군은 경상우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고, 경상좌도에서도 세력이 위축되어 주요 거점을 조선군 및 의병에게 빼앗기에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에서 거점 도시를 상실해 감에 따라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군은 두 달 후 평양전투에서 단 한 번 패배한 것을 이유로 한양성 이북의 모든 병력을 한양성으로 철수했고, 이후 치명적인 전투패배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양성에서 경상도 남부지역으로 군대를 철수했다.

일본에서 승전으로, 한국에서는 패전으로 적고 있는 제2차 진주성전투 결과로 인해 일본군은 9만명의 일본군 주력부대의 전투능력이 상실됨에 따라 일본군은 진주성 점령 후 목표로 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고, 부산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삼남지역 경영의 의지를 분쇄한 것이고, 실질적인 임진왜란의 종료를 뜻한다.

한 마디로 두 차례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승리하게 된 전투였다. 따라서 한국의 학계에서도 받아들이고 있는 제2차 진주성전투는 일본의 승리가 아닌 패전이며, 조선군 및 의병의 자발적인 옥쇄1)에 따른 실절적인 승리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일본군 9만 3천명을 동원하여 조선군 및 의병 5,800명이 지키고 있는 진주성을 24번의 공격에서 패퇴하고, 8일차 25번째 공격에서 성곽이 비로 인해 무너져 내림으로 인해 점령한 것을 두고 일본군의 승전으로 평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적의 대군을 맞아 언젠가는 성이 함락될 것을 알면서도 진주성으로 모인 전라도 및 충청도 의병, 관군의 퇴각 명령을 받고도 성을 지킨 진주성 주둔관군이 장기간 사투를 벌인 끝에 모두 전사한 것을 두고 패전으로 가치를 폄하할 일은 더욱 아니다. 또한 일본군의 전투력을 상실시켜 임진왜란을 실질적으로 종료시킨 제2차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 그 어느 전투보다 값진 의미가 있다.

다섯째, 두 차례 진주성전투는 지역 및 계층통합의 상징이다.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는 모두 진주성에 국한된 지역적 전투가 아닌, 지역을 초월한 조선인 전체 민관군의 국가통합의지에 의한 준비된 승전이란 의미가 있다.

진주대첩에서 김시민은 진주성 수성군 3,700명과 평소 함께 전투를 벌여온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 총3,800명만으로 3만명의 일본군을 맞아 싸웠다. 하지만 진주성의 위급함을 알고는 경상우도에 있는 인근 도시의 관군 및 의병 부대들뿐만 아니라 최경회 및 임계영이 이끄는 전라도 의병부대들이 진주성 외각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경상우병사 유승인은 진주성을 도우러 와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다. 또한 진주대첩이 군대만의 힘으로 일본군을 물리친 것도 아니다. 남녀노소와 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진주성민들이 전투를 벌이는 군사들을 도움으로써 진주대첩을 이끈 것이다.

제2차 진주성전투는 지역 및 계층통합 측면이 더욱 강하다. 9만 3,000명의 일본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진주성 수성군을 돕고자 전라도 의병부대와 충청도 의병부대, 그리고 경상우도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합류했다.

조명연합군 지휘부로부터 진주성으로부터 퇴각을 명령받은 상황에서 이들은 자발적으로 먼 곳으로부터 사지를 찾아온 것이다. 지역갈등이 존재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진주성 수성을 위한 노력은 세대를 초월하기도 했다. 전라도 화순 출신 의병장인 최경회는 당시 61세였으며, 나주 출신 의병장 김천일은 56세였고, 진주성 함락 이후 왜장과 함께 진주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19세였다. 물론 진주성민들이 진주대첩에서와 같이 군대와 함께 전투를 벌였다.

한 마디로 조선백성 모두가 지역, 세대, 계층을 초월하여 뭉쳤기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이다. 이러한 국가통합의 결과, 결국 임진왜란의 국란이 극복된 것이다.

여섯째, 두 차례 진주성전투는 모두 조선군 및 의병이 전투 이전에 철저히 준비하여 치러졌다는 특징이 있다. 진주대첩을 이끌기 위해 김시민은 철저한 사전준비를 하였다. 대포와 화약을 비롯한 각종 무기를 준비하였고, 기마 500기를 포함한 3,700명의 군사에 대해서는 철저한 훈련과 동시에 전투시 위치 및 대처법을 숙지시켰다.

김시민은 진주성민에 대해서도 전투협력을 이끌어냈다. 노약자들에게 군대복장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도록 하였고, 전투시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돌을 나르는 등 민간인에 대해서도 전투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사전준비를 시켰다. 결국 이러한 철저한 사전준비가 3,800명의 병력으로 약 8배가 넘는 일본군을 완벽하게 물리친 원동력이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는 1차전과 달리 병력이 진주성 주둔군에 다양한 의병부대가 합류함으로써 군대의 체계성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주성에는 진주대첩을 경험한 진주성 수성군이 건재하였고, 무기와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또한 김천일이 지휘권을 장악하여 빠르게 군대를 배치하였고, 전투상황에 따라 전사자가 발생하면 융통성 있게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진주성민 역시 전혀 동요함이 없이 군대의 통솔을 따라 전투에 협력하였다. 조선군 및 의병이 5,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16배가 넘는 9만 3,000명의 일본군은 맞아 24회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결과적으로 전투를 위한 사전준비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차례 진주성전투는 다양한 역사적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 두 전투는 적은 수의 조선군이 8배와 16배의 일본군을 맞아서 4일 동안 10회, 8일 동안 25회의 임진왜란 전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일본군 총 3만 8,000명이 사망하여 임진왜란의 전투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두 전투는 지역, 세대, 계층 등 국가통합의 토대가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진 곳이다. 진주성은 철저한 준비로 인해 완벽한 승전을 이룩한 곳임과 동시에 사지임을 알면서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의병들이 격전을 치근 끝에 전원 옥쇄한 곳이기도 하다.

두 차례 진주성전투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조선백성의 국란 극복 노력과 결과는 진주성전투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또한 진주성전투가 발생했기 때문에 조선백성들이 생존을 위해 일시적으로 통합된 노력을 보인 것만은 아니다. 두 차례 진주성전투라는 역사적 사실을 이끌어낸 것은 조선인이고, 조선인은 언제 어디에서나 유사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진주성전투는 로마군에 항거한 이스라엘의 마사다 전투에 비견될 만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조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전원 목숨을 바쳐 옥쇄한 전투라는 점에서 두 전투는 공통점을 지닌다. 단, 이스라엘에서는 마사다를 이스라엘 군대의 상징으로 추앙하여 성전으로 지정하고 이스라엘 군대의 신병훈련의 마지막 장소로 선정하는 등의 노력을 한 반면, 진주성은 아직 국가의 상징으로까지 발전시키지 않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두 차례 진주성의 역사적 가치를 찾기 위한 향후과제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회복과 이해가 필요하다. 아무리 조상들이 가치 있는 역사를 창출하였다고 해도 후손이 그 역사 사실의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의미를 새기지 않는다면 그 역사적 가치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마사다 성전을 이스라엘이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후세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역사적 가치를 현실적으로 실현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갈등해결 및 국가통합의 상징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즉 일본군에 의해 허물어진 후 반으로 축소되어 재건된 현재의 진주성은 전투를 치렀던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되어야 하고, 목숨을 바쳐 국란을 극복한 조상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을 성역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1) B.C. 72-73년경 유대지방의 마사다 요새에서 15,000명의 로마군을 상대로 960명의 유대인이 전투를 벌이다 유대인 전원 사망한 것을 마사다 승전 또는 패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역사는 이 사건은 마사다 항전 또는 마사다 옥쇄(玉碎)라고 부른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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