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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 6·25전쟁은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린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습니다.
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어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상 이사회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되었습니다.
유엔군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겼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습니다.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평 지평리 전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양평 지평리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입니다.
바로 저곳에서 한국전 당시 엄청난 전투가 치루어 졌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지금 저 곳에 떡하고 버티고 있는 우리의 부대는 결전부대 00대대입니다
중공군이 1951년 2월 공세 시 양평 지평리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프랑스 1개 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에 맞서 중공군의 주력의 발목을 잡아 유엔군이 전력회복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최대한 쉽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말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어떡하면 전쟁이나 전투상황을 알기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끝에 찿아 낸 것이 구글어스를 통한 입체적 상황전개입니다. 지금부터 지평리 전투를 구글어스를 통해서 입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중공군이 1951년 2월공세를 보여주는 상황입니다. 미군 23연대에의 전면에 걸쳐서 중공군의 3개 사단이 집중공세를 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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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2월의 중공군 공세 |
결국 미군 23연대에 배속되어 있던 프랑스 대대만이 진지를 고수하였던 반면에 프랑스대대 주변의 양익(좌익 우익)의 전선이 중공군의 공세에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평리의 프랑스 대대만이 돌출된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선에서 돌출된 부분을 "벌지'라고 합니다. 2차대전당시 생비트, 바스토뉴가 위치하였던 벨기에의 아르덴 삼림지역 역시 당시 돌출 전선인 "벌지'였습니다.
그래서 벌지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지평리 전투가 벌지전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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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의 돌출된 프랑스대대만 섬멸하면 남한강유역에 대한 장악권은 중공군에게 넘어가고 더 중요한 것은 수원과 원주를 잇는 UN군의 전선을 양분할 수 있다는 전술상의 잇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공군은 프랑스1개 대대에 무려 3개 사단병력을 투입하여 섬멸하려고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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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2월 지평리 전투 상황도 |
이렇게 포위된 상태에서 프랑스 대대는 불굴의 토혼을 발휘하였습니다. 지평리를 둘러싼 고지는 포기하고 대대병력으로 지평리의 평지에 겹겹의 철조망을 구축하고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싸웠습니다. 밤마다 공격하는 중공군에게 맞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백병전을 불사하고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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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모습 |
산악능선으로 기동하여 아군의 후방과 좌우 측면 동시에 사방 팔방에서 그것도 밤에 따발총소리와 함께 공격하는 중공군을 상상해 본다면 그 섬뜩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전법이 주효하여 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보통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공군의 공격 숫자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고 후세의 전사가들은 말합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입니다. 밤에 온갖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공격하는 중공군을 수비하는 미군이나 유엔군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연대 병력도 사단병력처럼 느껴질수 있는 사항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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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3일낮밤을 프랑스대대는 중공군과 싸워 지평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의 주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에 후방의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 듬을 수 있었습니다.
5. 리지웨이 장군은 지평리에서 고립된 프랑스 대대를 구출을 명령합니다. 그래서 미8군 예하 5기병여단에 소속된 크롬베즈 중령에게 그 임무가 부여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성된 특수임무부대(TFT)가 구성되었습니다. 탱크 23대와 보병 150여명(1개중대)로 구성된 크롬베즈 특임대대는 지평리를 향해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림에서 파란 화살표가 크롬베즈 특임대대의 구출진격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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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고개 |
특히 곡수리에서의 피해는 막대하였습니다. 같이 동행한 보병중대의 피해가 컸습니다. 또한 시간적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롬베즈 중령은 보병의 엄호를 포기하고 탱크에 소수의 보병을 탑승시키고 탱크로서 중공군의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엿습니다. 그 막바디 고비가 바로 구슬고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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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차 장비를 구비하지 않았던 중공군은 크롬베즈중령의 특임부대의 지원공격에 그리고 프랑스대대의 사수의지에 결국 굴복하고 지평리에서 철수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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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의미있는 것은 한국전에서의 탱크 단독 운영이라는 경험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전에서 패튼장군이 보여주었던 탱크를 이용한 적 포위망 돌파의 전법이 한국전, 특히 지평리 전투에서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푸른한국닷컴, BLUEKOREADOT
고성혁 sdkoh40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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