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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23.알려진 역사, 알아야 할 역사 ③

기사승인 2021.07.21  01: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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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3. 일본군을 몰아낸 주역은 누구인가? 명군인가 의병인가, 조선관군인가?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위시한 대부분의 역사책에 임진왜란이 명군의 참전과 의병의 항전, 그리고 수군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선군은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각종 전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주인공은 누구인가를 살펴본다.

<표 6-7>은 1592년 4월부터 1593년 6월까지 임진왜란 중에 조선관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및 동원 병력을 정리한 것이다. 총 31회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전투는 13회이고,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는 18회이다.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 중에서 육군이 승리한 것은 8회이고, 수군이 승리한 것은 10회이다. 일본군의 승리는 1593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1593년 8월 4차 평양성전투까지 2개월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군의 승리는 육군의 경우 1593년 8월 이후에 집중되어 있고, 수군은 임진왜란 개전 1개월 후 처음으로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 해상으로 진출하면서 임진왜란 전 과정에서 전개되었고, 조선 수군은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

병력 동원 측면에서 있어서 일본군이 승리한 13회의 전투에서는 조선군은 총14만 9,700명을 동원한 반면, 일본군은 18만 4,200명을 동원하였다. 일본군이 승리한 대부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전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탄금대전투에서 병력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일본군은 상대방이 기마전으로 승부를 겨룰 때 어떤 작전으로 승리할 수 있는지를 알고 전략을 구사했으며, 병사 개개인도 전투경험이 많았기 때문이고, 상대적으로 조선군은 일본군의 강점을 몰랐기 때문이다.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이 8만명을 동원하고서도 일본군 1,600명에게 패전한 것은 지휘관과 병사의 작전능력 및 전투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준다.

이에 반해 조선군은 승리한 8차례의 육상 전투에서 2만여명을 동원하여 7만 7,000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또한 조선 수군은 10회의 해전에서 5만 7,970명을 동원하여 3만 1,420명의 일본 수군을 완파했다.

진주대첩과 행주대첩 등 성곽을 바탕으로 조선군의 강점이 발휘되고, 일본군의 강점이 발휘되기 어려운 곳에서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조선 수군 역시 보유하고 있는 강점을 극대화함으로써 해전에서 연승을 거둔 것이다. 조선 수군은 무기를 갖추고 병사 훈련과 전술을 연마하는 등 임진왜란에 대비하였고, 일본 수군이 보유하고 있지 못한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고 속도가 느리지만 강한 선박의 강점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략을 세운 것이 승리의 바탕이 된 것이다.
 
<표 6-7> 조선관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및 동원 병력,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표 6-8>은 조선군·의병 연합군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 및 동원병력이다. 조선군 및 의병이 한 차례 승리하였고, 2차 진주성전투를 일본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일본군이 한 차례 승리했다. 동원 병력에 있어서는 조선군 및 의병이 9,800명을 동원한 반면, 일본군은 9만 5,972명을 동원했다.

동원 병력수에 있어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전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의 사망자가 엄청나게 발생한 것을 감안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조선군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군과 의병의 연합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강점이 잘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표 6-8> 조선군 및 의병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및 동원 병력.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표 6-9>는 조선의병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와 동원병력이다. 11회의 전투 중 조선의병은 8회 승리하였고, 일본군은 3회 승리했다. 동원 병력에 있어서는 조선의병이 4만 2,450명을 동원하였고, 일본군은 5만 4,030명을 동원했다. 조선의병이 승리한 전투에서는 조선의병의 동원병력이 일본군에 비해 다소 많은 반면, 일본군이 승리한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병력수가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병이 패전한 1차 및 2차 금산성전투와 1차 성주성전투는 전투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기보다는 우국충절에 의거하여 무모한 공격을 한 결과이다. 1차 금산성전투는 고경명이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한양성으로 향하던 중 금산성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공격한 전투이다.

2차 금산성전투 역시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과 영규의 의병이 700명의 소수 병력을 이끌고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목숨을 바친 전투이다. 1차 성주성전투도 조선의병이 승리하기 위한 전투였다기보다는 조선인의 우국충절을 보여주기 위해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던 전투였다. 조선의병의 세 차례 전투 패배는 병력의 열세로 전투에서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일본군의 침략에 항거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으로 패배의 의미가 없는 전투였다.
 
<표 6-9> 조선 의병과 일본군 간의 전투 및 동원 병력.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표 6-10>은 명군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와 동원병력이다. 3회의 전투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4차 평양성전투와 벽제관전투의 2회라고 할 수 있다. 조·명연합군이 승리한 4차 평양성전투에서는 승리의 분기점에서 이여송이 명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준 까닭에 일본군의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

반면, 벽제관전투에서는 평양성전투의 승리로 인해 자만감에 도취된 명군이 무리하게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적진 깊이 들어갔다가 포위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임진왜란 대 명군이 참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군은 두 차례의 전투만을 치른 채, 명군의 희생이 따를 수 있는 전투는 하지 않고 일본군과 화의협상을 함으로써 전쟁을 종결하려고 하였다.
 
<표 6-10> 명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및 동원 병력.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표 6-10>은 임진왜란 시 전투를 치른 주체를 정리한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일본군과 가장 많이 전투를 치른 주체는 조선관군이다. 조선관군과 일본군 양측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명군은 일본군과 3회의 전투만을 치렀고, 동원된 병력수도 가장 적었다. 즉 임진왜란을 극복한 주인공은 조선관군이며, 의병이 중요한 시기에 관군에 큰 도움을 주었고, 명군은 4차 평양성전투 이외에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표 6-11> 조선군, 조선의명, 명군의 대일본군 동원 병력 요약.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그렇다면 조선군이 임진왜란에서 일본군과 각종 전투에서 접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조선관군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벌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침략군을 맞이하여 의병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전투를 벌이는 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병의 역할이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이 주변국의 침입에 원군을 보낸 것도 매우 예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조된 것도 이해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기술함에 있어서 관군의 역할이 배제된 채 수군과 의병, 명군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 첫째, 조선관군이 패전의 주역으로 기술되고, 국란극복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이 독립국인가를 의심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치력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즉 임진왜란 시 조선이 독립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은 스스로 국가를 유지할 수 없고, 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유약한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관군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축소, 왜곡한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명군과 의병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역사기술은 역사 서술자의 교묘하고 의도적인 왜곡이다.

둘째, 조선 수군의 연승에 의해 국란을 극복했다는 역사기술 역시 매우 큰 문제를 낳는다. 물론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일본군의 해상 진출로와 보급로를 차단했고,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일본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군의 역할만으로는 육군의 진출을 막을 수 없다. 조선 수군의 역할에 의해 전라도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같은 주장은 조선군의 역할 전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줄 수 있다. 일본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진출을 시도했고, 번번이 조선 육군에 의해 좌절된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즉 권율이 지휘한 웅치전투와 이치전투, 고경명 의병의 1차 금산성전투, 곽재우의 정암진전투, 진주대첩 등의 육지전투에서의 승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이들 전투에서 단 한번이라도 승리하지 못했다면 전라도 역시 일본군의 점령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셋째, 실질적으로 조선 의병은 관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군체제는 국민개병제로 모든 조선백성이 평시에는 민간인 신분이고, 전시에는 군인이 되는 체제였다. 즉 백성들이 관군에 의해 징집되면 관군이 되는 것이고, 의병 대장의 휘하에서 전투를 벌였다면 의병군이 되었다.

또한 의병 대장 대부분이 전직관료로 정부지휘체제 하에서 유기적으로 협력하였고, 의병 대장의 지휘를 받은 하위 지휘관은 현직 수령과 무관들로 구성되었다. 더욱이 전공을 세운 의병 대장에게는 조정에서 직위를 부여하였고, 의병군은 정식 군대로 편입했다. 따라서 조선군을 관군과 의병군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따라서 조선군이 주도하고 조선백성이 협력함으로써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으로 역사가 기술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전투를 조선군이 치렀고, 이 과정에서 조선백성 모두가 자발적으로 협력한 것이다. 조선 수군 역시 그에 합당한 역할을 하였고, 명군은 상징적인 참여에 그친 것이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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